Just a word

대운동회에서 쿠라사와 쁘띠존 청심료 5호실 소설 배포본에 참여한 글입니다. 제 주제는 프로야구 선수였습니다. 연령반전 요소가 있습니다.

 

쿠라모치가 처음 사와무라에게 진로를 물어본 것은 사와무라가 3학년이 되기 전, 겨울연습으로 바쁘던 어느 날이라고 기억한다. 설을 집에서 보내고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연습뿐이었다. 오랜만의 고시엔진출 때문인지 평소보다 그라운드를 찾는 인원은 늘어있었다.

“사와무라 선배는 프로에 갈 건가요?”
“글쎄—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갑자기 왜?”

트레이닝 복을 걸치고 방에서 나가려는 준비를 하는 사와무라에게 쿠라모치가 물어보았다. 글러브를 가져가지 않는 것을 보면 운동장에 나가서 달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냥…… 최근에 보러 오잖아요, 스카우트들.”
“그래? 몰랐는데.”

아무렇지 않은 말이었지만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믿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정말 몰랐을 리는 없다. 모르긴 몰라도 벌써부터 찾아오는 스카우트들은 경기를 보러오는 OB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고 쿠라모치도 느낄 정도였다. 관찰과 분석이 직업인 사람들 역시나 그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듯한 분위기—물론 쿠라모치와 같은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나 코치 같은 관계자들에게서. 물론 그들이 보는 건 사와무라만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라운드로 발을 옮기는 쿠라모치에게도 그라운드에 구경을 온 사람들끼리 나누는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이요? 라고 물어보려던 쿠라모치는 곧 사와무라에게서 나온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쿠라모치, 그런 거나 보고 연습 제대로 안 하면 하룻치한테 한 소리 들을 걸. 하룻치가 저래 보여도 형님만큼 무섭단 말이야.”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5호실에서 나갔기 때문에, 쿠라모치가 뭐라고 더 말할 틈도 없었다.

“……나도 나가서 연습이나 할까.”

사와무라가 나간 뒤 쿠라모치는 야구노트를 다시 이어서 적으려다가, 갑자기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펜을 놓고 기지개를 켰다. 방 한 편에 세워진 배트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린 쿠라모치는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벌레인 선배와 같은 방을 쓰면 이렇게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가 입학하기 한 해 전 1학년 때부터 주전 멤버에 들어가기 시작해 활약한 선수로 쿠라모치가 입학하던 해에는 서도쿄지구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치바에서 자랐고 고교야구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못하던 쿠라모치는 부에 들어온 이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응원석에서 관전한 첫 경기. 마운드에 선 사와무라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온 쿠라모치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조금은 유치한 분장을 하고 있었던 첫인상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모습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벤치멤버로 들어간 후 벤치에서 마주했던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에게 익숙한 긍정적이기만 한 모습이어서 안심했지만. 역시 그 모습은 그라운드에 서서 바라보는 등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뿐이었다. 포지션이 다른 탓에 쿠라모치가 사와무라와 같이 연습할 기회는 적었지만 쿠라모치는 그 뒷모습에서 많은 것을 읽어냈다. 주변을 파악하는 것은 쿠라모치의 특기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와무라가 먼저 말해주길 바랐다.

센바츠에서 쿠라모치는 2학년이, 사와무라는 3학년이 되었다. 세이도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그날은 그들을 향한 마이크가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사와무라는 침착한 태도로 패배의 이유를 곱씹었다. 이전에 쿠라모치의 상상 속에서 마이크를 앞에 둔 사와무라는 저렇게 정돈된 말을 내뱉는 선수가 아니었다. 마이크와 카메라를 앞두고도 벤치에서처럼 시끄럽고 독특한 언어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 너머에서 사와무라를 지켜보던 쿠라모치는 어렴풋이 사와무라가 프로에 갈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내 쿠라모치는 그 결정을 제일 처음 들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사와무라가 쿠라모치에게 연락을 한 것은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어서였다. 이번에는 3학년이 된 쿠라모치가 진로 고민을 막 끝낸 것은 아직 더위가 사그라지지 않은 늦여름이었다.

“쿠라모치는 대학 진학이라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네.”
“전에는 나한테 프로에 갈 생각 없냐고 계속 물어봤으면서, 너야말로 프로 지망할 생각은 없어?”

사와무라의 질문에 쿠라모치는 벌써 1년도 넘게 지난 옛날이야기가 된 과거를 떠올렸다. 사와무라 선배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대를 드러내었고, 그런 의도는 없겠지만 질문에서는 결정을 독촉, 혹은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마감일까지 좀 남았잖아—사와무라는 덧붙였다. 물론 그랬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미 미유키의 지망서를 연맹으로 보냈고, 쿠라모치도 결심을 굳힌 이후였다. 이틀 동안의 짧은 귀성기간 동안 가족들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고, 담임선생이나 감독과도 상담을 끝낸 후였다. 프로라는 말은 매혹적이었지만 쿠라모치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은 없어요. ……저는 선배랑 달라서.”
“뭐야 그게.”
“솔직히 사와무라 선배는―멋있었다고요. 지금도 그렇고. 제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건 알아요.”
“멋있기는 뭐가……. 나 아직 1군 경기에도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그리고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건 사와무라 선배가 제 선배라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라요.”

한참을 당황해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사와무라가 입을 다문 순간이었다. 어쨌든 저는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쿠라모치가 그렇게 잇자 전화 너머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뭐 본인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기는 한데…… 조금 아쉽네.”

쿠라모치도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라는 지극히 잘 풀릴 때의 미래를 놓아주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이 매번 그들이 해온 일이었다. 그런 가정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일에 집중하는 것. 차근차근 하나씩 노력하면 골은 언젠가 눈앞에 다가온다.

“4년 후에는 저도 선배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힘내. 기다릴게.”

화면 너머 사와무라에게는 보일 리가 없었지만 쿠라모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멈추자 때마침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와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나도 네가 올 때까지는 1군에 올라가있어야 할 텐데. 4년 후에도 이대로라면 체면이 안 살잖아.”

가뜩이나 높게만 느껴진 허들을 더 올리겠다는 사와무라의 말에 쿠라모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4년 후를 기다리라는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침대에 누워있던 쿠라모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들어오세요.”

쿠라모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 빼곰 얼굴을 보인 것은 사와무라였다.

“아, 사와무라 선배.”
“놀러왔어. 오늘 정신없었지?”
“조금…… 선배도 이랬어요?”
“응. 그래도 역시 타카하시 선배보다는 덜했어. 나 때는 타카하시 선배가 1지명이었잖아.”

쿠라모치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프트 1위가 머물게 된 옆방을 드나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쿠라모치의 방은 조용했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옆에 앉아서 방을 훑어보았다. 짐정리를 다 끝낸 방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깔끔함 면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상 옆의 수납장에 고등학교 때 기숙사 방에서 본 기억이 있는 제목의 책이 몇 권 보였다.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 들어간 사진도 바뀌지 않았다. 1인실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청심료의 5호실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보여서 사와무라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아, 게임기도 가져왔네. 너 여전한가 보구나.”
“게임 정도는 다들 하잖아요. 선배는 안 한다고 하진 않겠지요?”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선배도 같이 해요. 예전처럼.”
“그럴 체력이 너한테 남아있으면―우리 훈련 힘들다?”
“그거 전부터 선배가 계속 말해서 각오하고 있어요.”

계약을 마쳤을 때부터 사와무라에게서 걱정을 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그렇지만 겨울동안 너무 무리해서 연습하지는 말고, 언제나 그런 문자가 뒤에 따라왔다. 쿠라모치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그의 등을 두드리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까 같이 내려가자.”

새로운 생활을 앞두고 긴장했던 것은 다행히도 익숙한 사람 덕분에 금방 풀렸다. 세이도 출신의 선배들이나, 대학 선배들이 있는 팀은 이곳 말고도 있었지만, 정말로 사와무라 선배가 있는 팀이라 다행이라고 쿠라모치는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와무라를 따랐다.

 

“내일도 응원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말을 끝내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박수가 돌아왔다. 마지막 이닝이 끝나기 전에 이미 경기장을 빠져나간 관중도 있어서 관중석 사이에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지만 소리만큼은 커다랗다. 첫 히어로인터뷰 자리라 그럴까, 이렇게 들으니 새삼 가슴이 뛰었다.
인터뷰를 끝낸 쿠라모치가 벤치로 돌아오자 아직 남아있던 선배들이 쿠라모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경기가 진행 중이던 때보다는 조금 덜 거칠게.

입단이 결정된 후로 쿠라모치에게는 이번 시즌의 목표를 말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기자들에게 꺼내는 말은 이상에 가까운 희망사항에 가까웠고 쿠라모치에게는 물론 그보다 현실적인 숫자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머릿속에 있는 시즌 이루고 싶은 일 리스트에서 차근차근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히어로인터뷰를 해보는 것도 그 목록에 있었다. 그 상상속의 리스트는 쿠라모치에게 다가온 사와무라의 목소리로 인해 팡 터져버렸다.

“어땠어? 인터뷰.”
“조금 긴장했어요.”

사실은 조금이 긴장한 정도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사와무라는 그 작은 허세를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 별로 티 안 나던데.”
“그랬어요?”
“응. 이야, 역전 당했을 때는 내 1승이 이렇게 날아가는 건가 걱정했는데. 오늘은 고마워.”
“……선배, 그게 걱정이었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티가 나지 않았다는 말에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쿠라모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쿠라모치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조금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가 그것도 깨닫지 못하기만을 바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사와무라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입단 첫 해에 이루고 싶은 것 목록에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프로가 된 것은 아니지만 칭찬은, 특히나 이 선배에게서 듣는 칭찬은 전부터 큰 동기부여가 되었으니까.

“선배랑 같은 팀이라서 다행이네요. 선배한테서 1승을 뺏을 일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사와무라의 앞에서 아직도 솔직하지 못한 쿠라모치는 또 다른 허세를 부릴 뿐이었고 사와무라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라모치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