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미래설정, 모브 언급 있음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쿠라모치의 머릿속의 카운터에 숫자가 하나 더해졌다. 좋은 일이라면 이런 것은 기념해도 좋겠지만 그런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번 반복되어 온 행동은 일련의 의식을 만들었다. 사와무라에게는 잊기 위한 과정이었고 쿠라모치에게는 기억하는 과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사와무라에게는 야구 이외에도 청춘의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다—고 쿠라모치는 생각한다. 적어도 쿠라모치가 목격한 바로는 그랬다.

양 손으로 상대의 뺨을 잡고는 입을 맞추고 있는 뒷모습을 마주하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쿠라모치는 그 상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모퉁이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간지러웠다. 걱정을 해야 하는 쪽은 분명 저 두 사람인데, 한숨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안절부절 두 사람이 떠나기를 기다리던 것은 쿠라모치였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그러니까, 그거였다. 그 교복차림의 뒷모습이나 웃음소리는—조금 낯설기는 했지만—오늘 아침에도 같은 방에서 나왔던 후배가 분명했다. 다만 쿠라모치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그 상대는 체격이 좋은 바지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라고 오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디를 보나…….

너 그런 취향이었냐?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 물었다. 사와무라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쿠라모치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에, 3층 과학실 가기 전, 하고 운을 띄우자 사와무라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며 쿠라모치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물론 그 전에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가볍게 제압했다. 학대니 폭력이니 하는 말 사이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변호가 이어졌지만, 쿠라모치는 그것을 모두 무시하고 사와무라를 발로 한 번 찼다.

들키지나 않게 조심하고 다녀.

물론 그때 사와무라는 대답은 잘 했다, 대답은. 하지만 한 번 있는 일은 두 번도 있다고, 그 뒤로도 쿠라모치가 졸업하기 전까지 두어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두 다른 상대. 발렌타인 데이 같은 때의 사와무라는 전혀 연애니 고백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그랬다. 처음 마주했던 그때 본 것처럼,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또르르르 그라운드를 굴러다니는 그것 위로는 흙이 묻고 땀이 묻지만, 다시 한 꺼풀 벗겨내면 단 냄새가 진득하니 풍긴다. 그것이 싫어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는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첫, 못 본 척을 했다. 사실 사와무라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분명 상대가 조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만약 쿠라모치가 그때 그 두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졸업과 함께 사와무라와의 연락을 끊었다면.

이후 사와무라가 가져오는 연애담은 연애담이라기보다 실패담이라고 불러야 어울릴만한 것이었다.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이야기들. 남의 커플 이야기를 듣는 것도 쿠라모치의 취미는 아니었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지겹다는 태도도 취해보았지만 사와무라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쿠라모치에게 가지고 왔다.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해요.
너 이런 건 내가 아니라 왜, 카네마루한테 잘 했잖아.
미쳤습니까? 이제 막 연애초기라고 들떠있는 카네마루한테 이딴 얘기나 하게. 그건 아니지요.

정색을 하는 사와무라를 보며 쿠라모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딴 이야기라는 자각은 있건만 선배한테 이러는 거라고, 그래. 사와무라는 덧붙였다. 거기다가 기숙사에 안 사는 거 선배밖에 없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쿠라모치가 사는 곳도 기숙사라면 기숙사라고 부를 수 있지만 대학과 회사라는 차이나 분위기의 차이라는 것은 큰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는 이유가 다 되지 않는다.

적당히 늦지 않게 사와무라를 돌려보내고 돌아온 쿠라모치는 테이블 위를 치웠다. 분명 가장 큰 이유는 불평을 하고 무시를 해도 결국 쿠라모치는 사와무라가 오는 것을 막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들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학교 기숙사에서 쿠라모치의 방까지의 정류장 수에도 불구하고 매주 꼬박꼬박 출석도장을 찍던 사와무라는 결국 헤어졌다는 말을 했다.

이런 때는 한 잔 하고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하더라.

얼마 전 실연을 했다고 침울해있던 동료에게 건네진 말을 떠올리며, 잊어버리라고 쿠라모치는 말했다. 사와무라는 맥주 한 캔을 다 비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냉장고에 술을 채워놓는 편도 아니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분의 이불 같은 것도 없는 방이었기에 쿠라모치는 대충 사와무라를 침대 위로 끌어 올려서 재우고 새벽 일찍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사와무라가 정말로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쿠라모치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사와무라와 마주칠 일은 없었기에 쿠라모치는 상대의 얼굴도 알 수 없었다. 별로, 그런 놈의 낯짝 따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사귀고, 삐걱거리고, 헤어지고. 세상에는 그 중간 단계를 잘 극복하는 커플도 많은 것이 분명하지만 사와무라는 대체로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차였다는 말을 듣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한 상대만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사와무라가 쿠라모치를 찾아오는 간격은 조금 길어졌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지 못하고 뻗던 때가 그립게도 지금은 알아서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인지 종이팩에 든 술을 사오게 되었다. 사와무라는 본가에서 할아버지에게 술을 배워왔다고 했지만 배워온 것은 예절이 아니라 술 취향뿐이라고 쿠라모치는 생각했다. 혼자서 분이 받쳐서 우는 일은 조금 줄어들었다. 그것만 빼고는 여전히 금방 취하고, 금방 잠에 떨어졌다. 사와무라가 제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침이면 쿠라모치는 시간이 나면 이불을 하나 사오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도 가격표를 볼 때면 굳이 니토리까지 갔다 오고 싶지도, 그런 데에 지출을 늘리고 싶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와무라는 왼쪽으로 돌아서 자는 것이 습관이었던 것 같기에 자연히 침대의 오른쪽을 내주게 되었다. 조용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등을 바라보며 가끔 쿠라모치는 사와무라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사와무라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있었고, 쿠라모치가 짐작만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학창시절처럼 반짝반짝 풋풋하기만 한 연애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실제로 어땠는지는 알지 못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쿠라모치는 알게 되었다. 연인사이의 일은 겉으로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의 입안에서 빛나던 사탕이 아니라, 밟히고 깨지고 채여서 여기까지 굴러 들어와서 버려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를 모습을 보는 것은—보고 싶지 않았다. 쿠라모치가 알게 된 두 번째 사실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시야에 사와무라의 등이 보이는 것이 불편해졌기에 쿠라모치도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쿠라모치가 아는 한, 사와무라의 열 번째 이별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똑같은 끝을 맞이했다. 쿠라모치는 무덤덤하게 문자의 답을 보냈다. 사와무라가 문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뭐 이유야 뻔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 사와무라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역에서 걸어오는 길에 있는 마트에서 한 봉지 가득 과자와 술을 사오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빈손으로 쿠라모치의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건물 입구에서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쿠라모치 선배. 기다리고 있지 뭐 하겠어요.

등을 한 대 치고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 언제부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다 달아났기에 쿠라모치는 그대로 사와무라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와무라가 아무것도 사오지 않은 탓에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돌아 나와 마트로 향했다.

마트 도시락을 먹으면서 사와무라는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 전에도 몇 번이나 그랬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은 말에 쿠라모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때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내일도.
왜.
같은 방이거든요. 그 사람.
아…… 그거 참—어색하겠네.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얼굴 보기 좀 그런 것 같아서—이번 학기로 그 선배는 졸업하니까 당분간 신세 좀 질게요. 나름 진지한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는 사와무라를 바라보던 쿠라모치는 문득 깨달았다. 이번 상대가 누구인지 자세히 말 한 적은 없었지만 입학했을 때부터 기숙사의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선배에 대해서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쿠라모치가 제대로 기억한다면 사와무라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으니, 다른 사람일 리는 없었다.

너, 그 같은 방 선배라는 사람……?
같은 팀.
……맞지?

이번에도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학년 위의, 무슨 전공이라고 했더라, 졸업한 후에는 가업을 이을 거라고 했던,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이 쿠라모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은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쿠라모치는 기억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오늘 사와무라는 술을 사오지 않은 걸까, 마트에서 평소 같은 저녁이 되도록 장을 봤어야 했는데. 맨 정신의 사와무라는 말이 많았다. 그것은 아무 말이 없는 등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불편했기에 쿠라모치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저녁 경기가 나왔지만, 침대에 기댄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제대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잘 아는 사람이랑 사귀는 건 후속풍이 너무 큰 거 같아요. 헤어진 다음도 불편하고. 그러니까 다음에는……
그 사람이랑은 왜 사귀었던 건데?
으음…… 글쎄요, 왜라고 물으면……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대학 들어간 후로 쭉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거 참, 대단한 이유네—그러니까 네가 하는 연애라는 게 그 짝이었지.
그게 뭐가 어때서요.

투덜거렸지만 사와무라는 그 이상 반박하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쿠라모치에게 찾아왔던 날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와무라도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서 불안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자신의 좋아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조금 더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두 사람만의 특별한 관계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도 오늘로 끝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나도 있잖아.
예??

깜짝 놀라서 쿠라모치를 바라본 사와무라의 눈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보였다. 진심입니까? 믿고 싶지 않은 말에 망설이며 물었지만 대답은 확실했다. 응.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사와무라는 한참을 입만 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현실을 부정하듯이 말했다.

아니, 좀 전에 말 했잖아요. 다음에는 아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사귀어서 그 모양이었냐?

하지만 쿠라모치도 단호했다. 변명을 하듯이 이어지는 사와무라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평소보다는 조금 느리고, 조금 작았다. 눈동자는 쿠라모치를 피하고 있었기에, 쿠라모치는 오히려 사와무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어가 이어지는 사이에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나, 몇 번이나 눈을 덮는 눈꺼풀. 알기 쉬운 성격은 여전했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선배랑 연애……라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고.
아 그건 그렇지.
그렇지요?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네가 연애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워.
……어쨌든 싫습니다.

사와무라는 깍지를 낀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옆은 아니지만 손이 닿을만한 곳에 쿠라모치가 있었다. 제일 상상하기 싫은 일이 있었다. 쿠라모치 앞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헤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라고—갈 데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혼잣말이었다. 쿠라모치가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계산도 할 줄 아네.
당연하잖아요. 이제는 앞날정도는 생각할 정도로 성장했다고요.
바카무라주제에 말이지.

꽤나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는데도 사와무라는 가만히 있었다. 물론 입술은 삐죽 내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쿠라모치에게는, 그대로 두면 사와무라는 행복의 정반대의 길을 고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그랬으니 확신이 아니라 통계적인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와무라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구겨지고 깨진 사와무라가 굴러오는 장소도, 그를 주워서 다시 깁는 것은 쿠라모치일 것이다. 그것 또한 이제까지 그랬듯이.

너 말이야 그래서 짜증나. 이런 때는 선배 말 좀 들어라?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갈 데가 없기는 왜, 내가 너 어디 다른 데서 울게 내버려 둘까봐.

다만 그 거리가 줄어들 뿐이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사와무라가 겨우 쿠라모치를 바라보았다. 말이 없었지만 알기 쉬운 눈이었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가 본 것처럼 빛나지도 않았지만, 생각한 것처럼 까끌거리지도 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