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전력 #1 첫눈

사와무라를 욕실로 밀어 넣은 쿠라모치는 하품을 하며 옷장을 뒤졌다. 부피가 크지 않은 가방을 보면 갈아입을 옷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품이 작다거나, 바지 길이가 짧다거나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잠시 걱정되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사와무라에게 들은 말에 따르자면 사와무가 나가노로 간 것은 엊그제. 어제는 지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고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아니 날짜가 바뀌었으니 어제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기상악화로 본래 타려던 신치토세행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듣기까지 신슈마츠모토 공항에서—쿠라모치는 그게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몇 시간이나 기다렸던 사와무라는 나가노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도쿄로 내려왔다고 했다.

집에 갔던 거라니, 쿠라모치는 그래서 짐이 적은, 아니 없다시피한 이유가 이해가 갔다.

“오랜만에 카네마루랑 토죠랑 만나서 저녁 먹었어요! 다른 애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역시 갑자기 연락해서 그런지 다들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설마 얻어먹은 건 아니겠지?”

대학 리그에서 성적을 내고 있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 이름이었지만, 사와무라의 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하필이면 저 멤버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쿠라모치는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아니, 제대로 사줬어요!”
“응. 잘했네.”

잠시 수건을 떼고 머리카락을 만져보자 물기가 많이 가셨다. 손가락 사이에 잡힌 갈색 머리를 바라보면서 고등학교 때는 이것보다 조금 짧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뭐 겨울이기도 하고 그때와는 다른 점에서도 많이 달라졌으니, 쿠라모치는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베개 없는데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실내등을 끄고 이불속으로 들어온 쿠라모치에게 사와무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러니까 옛날 같다.”
“어디가? 너랑 같이 잤던 기억 같은 건 없는데.”
“에이, 왜 그래요. 그런 거 아니더라도 쿠라모치 선배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잖아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긍하면서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어두워서 사와무라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쿠라모치는 괜히 등을 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기야 했다. 사와무라가 입단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사와무라는 가끔 귀성하러 고향에 내려가는 모양이었지만 도쿄에 오는 일은 거의 없었고, 오더라 하더라도 고등학교 동문들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쿠라모치와 만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온다는 연락도 한 적 없었는데.

“정말로 왜 온 거야? 여기서 공항까지는 먼데.”

가볍게 들리던 웃음소리가 쿠라모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잦아들었다. 사와무라? 이름을 부르며 쿠라모치가 몸을 틀자 사와무라는 겨우 입을 열었다.

“쿠라모치 선배도 기숙사 들어가잖아요, 이제.”
“그렇지.”
“저, 그쪽까지는 갈 일도 잘 없고. 가도 자고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앞으로는……전보다는 자주 볼 수 있을지도.”

아마. 즉전력으로 투입될 수 있을지는 내년이 되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사와무라의 출전횟수도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쿠라모치와 맞붙을 일도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었다. 지금처럼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하는 사이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쿠라모치는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그…… 쿠라모치 선배가 기숙사 들어가면 정말로 다른 팀이 되는 거니까, 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와보고 싶ㅇ”

사와무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야 그게.”
아아아아홀아흐니까그안자아ㄷ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쿠라모치의 입도 손도 같이 움직였다. 한참을 볼을 쭈욱 잡아 늘이다가 손을 툭 떼었다. 정말로 간만에 만져보는 감촉에 옛날 같다고 느꼈다. 누워있는 게 아니라면 옛날처럼 발로 한 번 제대로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 진짜 아프잖아요.”
“너 생각하는 게 한심하잖아. 언제는 응원하겠다고 했으면수 이제와선 다른 팀이 된다느니.”
“다른 팀은 맞잖아요…….”

얼마 전 쿠라모치가 계약조건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와무라가 그를 축하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빨리 맞붙을 날이 오면 좋겠다고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들떠있었던 시간이 지나자, 사와무라에게는 아쉽다는 생각이 커졌다. 다른 유니폼을 입게 된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수비때 마운드에서 쿠라모치의 앞에 서는 사람이 다른 선수가 될 거라는 것을 생각하니 조금—아니 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답장이 없었는데도 무작정 쿠라모치의 자취방 근처 역으로 찾아왔다. 사와무라가 볼을 문지르고 있는 것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왔기에 쿠라모치도 손을 뻗어서 그 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홍백전 같은 거라고 생각해.”
“홍백전이요.”
“응. 고등학교 때 했던 거, 기억나지?”

그거야 사와무라도 기억한다. 사와무라와 쿠라모치는 다른 팀이었다. 첫 경기에서는 의외로 쿠라모치를 잘 막았지만 쿠라모치 학년이 은퇴한 후에 있던 OB전에서 쿠라모치는 그때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아 그것도 있구나, 다음번에 붙게 되면 쿠라모치는 그때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네 말대로 지금은 같은 팀은 아니지만… 시간은 많으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다른 팀에 있을 시간은 길고 앞날은 알 수 없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와무라는 지금 당장 뺨에서 떨어지지 않는 채 눈가를 계속해서 쓰다듬는 엄지손가락이 언제 다시 볼을 꼬집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대답을 얼버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