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전력 #13 괜찮아

12시간 지각이라서 죄송합니다.

 

게임을 하던 쿠라모치를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사와무라는 다시 만화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다 지난번에 그런 만화를 빌려준 반 친구의 잘못이었다. 시리즈 중에 하나 표지도 그림체도 다르다고 생각했더니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여주인공이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믿었는데 사와무라의 믿음이 깨진 채로 여주가 아니라 남주의 키스장면이 먼저 나왔고 거기서 사와무라는 화들짝 놀라서 만화책을 덮었다. 침대에서 사와무라가 소리를 지른 탓에 그때는 침대에서 게임을 하던 쿠라모치가 덩달아 위에서 놀랐다고 화를 냈다. 사와무라는 조심스럽게 만화책을 그대로 책가방에 넣고 다음날 친구에게 반납했다. 왜 이런 걸 빌려줬느냐는 원망과 함께. 만화책을 돌려받은 친구도 알았으니까 제발 조용히 하라며 얼굴을 붉혔다. 쿠라모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한 건 그 다음부터라고 사와무라는 기억한다. 쿠라모치가 사와무라에게 말을 건 것은 사와무라가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무슨 일 있어?”
“예?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거짓말 말고. 요즘 너 이상하잖아. 뭔지 모르지만 얼른 내뱉으라고. 지금처럼 구는 거 기분 나쁘다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뭐 그러면 됐지만—걱정되니까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아…… 응. 정말로, 괜찮아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너, 나한테는 아무거나 말해도 괜찮다는 거 알지?”

사와무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쿠라모치는 눈을 뗄 때까지 개운치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고 다시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쿠라모치가 시야에 있는 동안 한숨 하나 편히 내쉴 수 없던 사와무라는 만화책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건 다 그 친구 잘못이다. 소녀들은 순정만화, 소녀만화 밖에서도 그림 같은 연애와 어울리지만, 사와무라가 아는 한 현실의 남고생은 그렇지 않다. 멋있다는 말이나, 동경, 신뢰, 그 이외의 이름은 필요 없었다. 방문을 닫고서야 사와무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에는 다시 5호실로 돌아와야 하지만, 잠깐 피해있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쿠라모치 선배, 정말로 뭐든지 말해도 괜찮아요?”

마침내 밤이 되었을 때, 사와무라는 위를 바라보며 겨우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층침대의 위아래를 나누어 쓴다니 얼마나 좋은가, 사와무라는 그때만큼은 그 사실을 반겼다—아니 사실 그것에 두근거린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좋은 방어책이 되어주었다. 일단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되었고, 얼굴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쿠라모치가 침대에서 내려와 사와무라의 앞에 서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고, 혹은 그렇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쿠라모치가 판단할 경우에는 전에도 몇 번 그랬듯이 베개나 던질지도 모른다. 제일 좋은 건 쿠라모치가 이미 잠들어있어서, 오늘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없었던 일로 지나가는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 이제 말할 기분이 들었어?”
“아…….”

하지만 불행해도 오늘은 이 시간까지 쿠라모치가 깨있었다. 다른 때는 몇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이 시간에는 잠들어 있었는데.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사와무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다물려고 했다. 쿠라모치가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다시 묻지만 않았더라면.

“사와무라? 그래서 오늘은 얘기 안 할 거야?”
“???????!!”

이층침대가 좋다는 말을 취소, 갑자기 몸을 일으키느라 사와무라는 머리를 쿵 부딪쳐버렸고, 쿠라모치에게 저게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아픔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와무라가 몇 번이나 혼잣말처럼 한 말은 쿠라모치에게는 정말 괜찮은 것이었던 모양이다—무슨 말을 해도, 손이 닿아도 되는 곳이 늘어나도, 괜찮았다. 하지만 사와무라도 그 모든 것이 5호실의 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시코쿠분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느 시간대나 외출을 할 때에 전철에 사람이 없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쿠라모치는 문가에, 사와무라는 그 옆자리에. 피곤했던 것인지, 사와무라는 자리에 앉자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하품을 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와무라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커플도 외출을 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깍지를 꼭 낀 손을 바라보면서 사와무라는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언제 돌아오는지를 묻는 문자를 확인하던 사이, 옆자리의 고개가 꾸벅꾸벅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쿠라모치의 눈에 들어왔다. 앉자마자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다시 메신저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