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골목, 가로등

약간의 판타지요소?

 

이른 겨울, 해 지는 시간이 빨라져서 날은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가로등 불빛에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이런 때면 나가노에서 올라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하고 싶은 야구를 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면서도 막상 기숙사에 들어갈 날이 가까워지자 도쿄는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무서운 곳이라며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할아버지는 당부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거기나 여기나 별로 다를 것도 없다며 반박했다. 어차피 에이쥰은 기숙사에 들어가서 야구로 바쁠 테니까 괜찮을 거라고.

아버지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교야구선수는 야구라는 수련을 위해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사는 수도승도 아니었다. 오프때 밖으로 나가는 건 물론 가끔은 군것질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오늘은 당장 쓸 노트가 떨어졌다. 어제도 깜빡한바람에 노트 뒷표지의 안쪽도 써버려서 오늘은 쓸 데가 없었다. 그래서 밍기적거리면서 기숙사를 나왔지만 오늘따라 골목길은 스산하게 느껴져 할아버지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나가노나 도쿄의 주택가나 다를 것은 없다. 양 옆이 논밭이라 아무것도 없는 흙길이나 불이 켜진 창문과 가로등이 있지만 인적에 드문 골목길이나, 응, 똑같다. 한 번 무섭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무언가 나타날 것 같은 기분에 등 뒤가 서늘해진 것까지도. 기숙사에서 편의점까지의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가 지금은 퍽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아까 나간 놈이 여기서 뭐하냐.”
“흐아아악!

그런 때에 갑작스럽게 엉덩이를 차이자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사와무라가 비명을 지르며 저 앞까지 달려간 것은 쿠라모치의 예상 밖이었다. 한참을 달려가더니 저편에 있는 가로등을 붙잡고 쿠라모치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안도감인지 쿠라모치가 인상을 쓰며 다가가자 쭈뼛거리며 가로등 뒤에서 나왔다.

“왜 그렇게 쫄아.”
“아니 갑자기 그러는데 당연하잖아요….”
“……갑자기는 무슨. 아까부터 이름도 불렀잖아.”
“안들렸어요.”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길래.”

평소라면 여기서 볼을 잡히거나, 엉덩이를 한대 더 차였을 텐데 오늘은 쿠라모치는 평소보다 구박이 덜했다. 사와무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쿠라모치는 그대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바로 옆에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골목길이 아까보다 덜 무서워졌기에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곁에 붙었다.

노트를 사고 약간의 군것질거리를 비닐봉지에 들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 오랜만이네 너.”

가로등 불빛의 끝자락에서 사와무라를 바라보며 야옹거리는 작은 형체가 있었다. 담벼락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보고 사와무라가 걸음을 멈추고 고양이 앞에 섰다. 서로 얼굴을 아는지 고양이는 사와무라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얌전히 받고만 있었고, 쿠라모치는 그 뒤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동안은 안보이더니. 이렇게 밤에 나와도 되는 거야?”

사와무라의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는 것인지 고양이는 사와무라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댈 뿐이었다.

“아는 고양이야?”
“네—이 옆에 사는 아저씨네 고양이인데, 어쩌다보니 기르게 됐다나봐요.”
“흐응.”

어쩌다보니는 무슨, 처음부터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쿠라모치는 등뒤에서 사와무라를 끌어안고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귀엽지요? 사와무라가 물어보는 말에 쿠라모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라모치의 눈에 고양이 껍질을 쓴 저것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감이 안 좋았는데 혼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나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사와무라 본인은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니 쿠라모치가 밝힐 일은 없지만, 세상에는 귀신도 있고 그런 것이 잘 들러붙는 사람도 있다. 사와무라는 그런 체질이었고 쿠라모치는 대충 그 반대였다. 그것도 쿠라모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교를 피워봐야 소용 없었다.

“주인이 있다니 다행이네.”

가자.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잡아 끌었다. 잘있어, 사와무라는 손을 흔들면서 작별인사까지 해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쿠라모치가 고양이를 돌아보자 고양이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이 녀석도 이미 주인이 있거든. 그렇게 전하며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는 보이지 않을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것에게 잘 보이도록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사와무라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