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톤 세나 일본전설

그런 두 사람의 관계였기에 세나가 사고사 한 후 가장 충격을 받은 드라이버는 베르거였다. 그것도 산마리노GP 기간중이었다. 토요일에 모국 오스트리아의 후배, 롤랑드 라첸베르거가 사고로 죽었고, 그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세나가 사고사해 버린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는 것도 큰일이었다. 5월 5일 상파울로에서 세나의 장례식을 참례한 베르거는, 그 전날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라첸베르거의 장례식에 갔었다. 이런 월드와이드적인 문상 행각이 또 있을까.

그 때문일까, 베르거는 세나가 사망한 산마리노GP 직후에 그가 드라이브하던 페라리에게 ‘은퇴’를 고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이상 포뮬러1에 탈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페라리의 루카 디 몬테제몰로 사장은 쟝 토드 감독과 베르거, 쟌 알레지를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으로 초대했고, 모두 베르거에게 F1드라이버를 계속하도록 설득한 결과 베르거는 겨우 F1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나의 죽음이 그에게 준 충격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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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인 구타사건

스즈카에 세나가 오면, 이상하게도 항상 트러블이 발생한다. 마지막 스즈카가 된 93년의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곧바로 구타사건까지 일어났다.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레이스 후 F1 데뷔전에서 6위 입상을 거둔 에디 어바인이 있는 조단 팀의 대기실에 밀어닥쳐서 말싸움을 벌인 끝, 결국에는 어바인을 후려갈겨 버린 것이다.

“그렇게 늦게 달리다니 머리가 있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백마커는 레이스 리더한테 양보할 의무가 있다고. 그 상황에서 (뒤로 빨리 달리는 차가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블루플래그가 나온 게 안 보였어?”
“그렇게 빨랐으면 나를 오버테이킹 하는 건 일도 아니었겠네요.”
“내가 느리다는 소리야? 그럼 왜 너보다 느린 내가 챔피언이겠어?”
“알게 뭐에요. 더 이상 이 얘기는 그만하고, 돌아가라고요”
“뭐. 너 이 자식, 선배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그렇게 말하고 세나가 나가려고 하는 순간,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어바인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댁한테 그런 얘긴 듣고 싶지 않네요. 90년에 스즈카에서 프로스트한테 한 짓을 내가 잊었을까봐. 그런 인간한테 존경심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를 듣는 건 사양입니다.”

이 말에 성이 난 세나는 돌아서서 어바인의 얼굴에 라이트 훅을 한 발 날렸다, 고 전해진다.

“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목격한 이에 따르면 세나는 결코 때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나가 라이트 훅을 날리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주먹으로 치려고 해도 치지 못했다는 것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구타사건”이 되어 버린 것은, 어바인이 “세나에게 얻어 맞았다”고 큰 소리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본래 두 사람의 싸움에는 복선이 있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싸움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레플리카 사건”이 있다.

91년에 전일본F3000으로 오기까지, 어바인은 국제 F3000에 참전하고 있었다. 당시의 그는 세나의 대팬이었다. 그래서 헬멧 디자인을 세나의 것과 똑같이 했다고 한다. 노란색 바탕에 녹색 라인이라는 세나의 헬멧을 꼭 닮은 디자인. 그 정도로 당시의 어바인은 순수하게 세나를 동경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것이 세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세나와 똑같은 헬멧으로 국제 F3000 경기를 하던 어바인에게 “저작권 침해”라고 법적으로 클레임을 건 것이다. 세나의 헬멧 디자인은 본래 브라질 국가를 어레인지 한 것이다. 그 디자인에는 브라질 국민으로서의 긍지가 배어있었다.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그것을 외국인이 따라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세나는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바인은 마지못해서 헬멧의 색을 변경해서, 현재의 오렌지색에 푸른색으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헬멧 디자인은 많이 닮아있다.

그 때 어바인에게는 “세나는 존경할 수 없다”는 마음이 벌써 생기기 시작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 시점에서 세나는 당당한 F1계의 슈퍼스타. 반면 어바인은 국제F3000 종합 3위. “격”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지만, 세나가 어바인에게 클레임을, 그것도 공식 클레임을 걸었다. 추리해 보자면, 천재 세나는 그 때 이미 어바인의 비범한 재능을 궤뚫어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89년에 국제 F3000 챔피언은 조단 팀의 쟝 알레지. 마틴 도넬리, JJ 레토, 에릭 코마스와 에릭 베르나르도 당시에는 어바인의 라이벌이었다.

당시의 동료들 대부분이 F1으로 올라간 와중, 어바인만이 다른 길을 택했다. 세계 모토스포츠 계의 지도에서 작은 존재에 지나지않았던 극동의 섬나라로 와서, 전일본 F3000에 참전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의 통찰과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이길 수 없는 팀에 가서 F1에서 싸우는 것 보다, 일본으로 가서 돈을 모으자. 그러는 것이 더 메리트가 있다.’

당시 과거의 동료들이 연간 50억원 정도의 스폰서를 찾기 위해 초조해하면서 3억원 정도의 연봉을 받으며 F1에서 드라이브 하는 와중, 어바인만이 전일본 F3000과 내구레이스에서 실력을 닦으면서 연간 8억원이나 되는 고수익을 손쉽게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방식에는 찬부양론이 있겠지만, 이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세나의 명예를 위해서 조금 이야기를 바꿔 보자면, 이런 일이 있었다.

93년 11월, 어바인이 시즌종료 후 인사차, 도쿄주니치 보도부에 들렸다. 이 점만 보면 매우 성실한 모습이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F1 참전에 대해서, 귀국한 이후의 일, 세나에 대해서 등등, 이것저것 질문을 해 보았지만 “모르겠다”, “글쎄” 하는 냉담한 대답 뿐. 그것도 정신은 딴 데 팔려 있는 듯이 보이는 얼굴 표정은 마치 ‘일본에는 돈을 벌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귀찮으면 인사 하러 오지 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돌아간 후, 도쿄주니치 스포츠의 사토 야스쿠니 부장이 조용조용히 말했다.  “저러니, 세나한테 얻어 맞지.” 그리고 “정말로” 하고 모두 크게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세나는 예의바르게 언제나 우리들과의 재회를 반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바인의 관심 없는 태도에 더욱 실망했던 것이다.

다만, 세나와는 다른 의미지만 이 정도로 주변에 아첨하지 않고, 마이페이스를 관철하는 드라이버도 드물다. 어쩌면 세나를 이을 거물은 이 남자일지도 모른다. 어바인은 그런 신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드라이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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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어바인 사건의 트랜스크립트라고 찾은 건데, 책이 참 말이 유해지고 대사가 줄었구나… 세나님의 말투를 저렇게 해놔서 죄송합니다 일본어로는 저런 말투 아니었어요. 존경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냐는 부분은 직역하면 네게는 선배 드라이버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게 없구나 하는 거였는데 내가 국어 존못이라도 공기는 읽을 줄 압니다 누가 그렇게 말해….

그런데 웹에서 찾은 데에는 프로스트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무슨 전설처럼 유럽판과 일본에서 전해진 이야기가 버전이 다른건가 어쨌든 이 깐죽깐죽대는 어바인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 이 93년 스즈카에 대해서는 엪원 레이싱 중에서 스맥다운 어쩌고 해서 기사 나온 거에 짧게 있던데… 그런데 웹에서 찾은 자료에서 에디가 You talk, you talk라고 했다는 부분에서 페르난도-펠리페가 경기 끝나고 파이트 뜨던 때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