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약간의 46권 스포일러.

쿠라모치의 어머니는 쿠라모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면 아들이 츤츤댈 것이며 없다면 야구소년에게 그런 걸 바라지 말라며 짜증을 낼 거라고 확신했다. ← 일단은 이렇게 트윗했던 걸 기반으로.

 

“일어났니?”

그녀가 문을 열고 그렇게 물어보았을 때 돌아온 대답은 작은 목소리였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인지, 아직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그녀는 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로 부엌으로 향했다. 국이 다 끓어갈 즘, 다시 반쯤 열린 문을 들여다보았을 때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던 아들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는, 무언가 기분이 좋은 것인지 웃고 있었다.

“아침부터 누구랑 그렇게 문자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얼른 나와서 아침 먹자.”
“어.”

손에서 핸드폰을 떼지 못한 채로 쿠라모치 요이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해 요이치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요이치가 기숙사에 들어간 첫 해에도 이랬다. 도쿄와 치바,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여름방학에 그가 집에 오는 일은 없었다. 야구소년들에게 휴일은 경기를 할 수 있는 날과 동의어라는 것은 요이치가 중학교 때부터 익숙해진 것이었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었다. 아들의 얼굴을 다시 본 시합이 없는 겨울방학에 잠시, 연말연시를 보내러 집에 올 때였다. 그사이 요이치는 키가 조금 자랐고, 지난번보다 살이 조금 더 탔고, 그렇지만 한동안 하고 다니던 금발이 아닌 제 머리색 덕분에 많이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고, 그녀가 보지 못한 곳에서 아주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잠자는 모습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며 요이치는 그녀의 곁에 섰다. 오늘은 뭐야? 된장국이랑 고등어. 엄마 나—가기 전에. 오므라이스? 응. 저녁때 해 줄 테니까 상에 수저나 놓으시지요. 입맛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이치의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알람에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들은 아직 여자 친구는 없는 거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여자 친구 얘기가 나오는 건데?”
“아침부터 계속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잖아.”

핸드폰 이야기를 꺼내자 조금 뜨끔했는지, 젓가락을 쓰는 손이 멈췄다.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자 친구가 아니면 뭘 보면서 그렇게 웃은 건데? 그녀는 퇴근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학생들을 떠올렸다. 날이 추워졌는데도 짧은 교복 치마에, 길게 내려온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손은 옆을 걷는 남학생의 손과 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꼭 붙어서는 웃고 있었다. 아마도 요이치 또래의 아이들일 것이다. 중학교 때처럼 말썽을 피우지 않고 야구만 하는 아들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결코. 하지만 저런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큰 바람일까. 분명히 지난번에는 여자 친구를 사귈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요이치는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아아—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래?”

요이치가 미적지근한 대답과 함께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요이치, 봄 고시엔이 언제라고 했냐? 경기 보러 간지도 꽤 되었는데, 가서 확인 해 봐야겠구먼.”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자 그녀는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올해는 작년처럼 보러 오란 말도 없었고…”

거기서 그녀는 잠시, 초여름에 통화를 했을 때 올해는 고시엔에 갈 수 있을 거라며 자신하던 요이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여름의 오사카는 더울 것이었고, 고시엔 시즌이면 숙소를 잡는 것도 어려울 테니 미리 준비해야겠다며 맞장구를 쳤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경기를 보러 갈 시간을 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이었다. 하지만 결국—그녀는 잠깐의 공백이 길어지지 않도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가을 대회는 언제였는지 말해주지도 않아서, 개막식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잖아요? 그러니까 아들 여자 친구 볼 기회도 놓치면 큰일이잖니?”
“아 진짜 이 아줌마가! 여자 친구 같은 거 아니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화는. 그런 거 아니더라도 아들 고시엔 데뷔는 보러 가야지.”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요이치는 얼굴을 찡그리며 둘에게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

“아침부터 문자는 왜 했어?”
“왜요, 어제 덕분에 도쿄역에서 헤매지 않아서 고마워서 그런 건데.”
“참 빨리도 했다. 열차 타고 했어도 괜찮잖아.”
“그때는 까먹고 있어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마디를 내뱉었을 때부터, 그는 아침의 일 때문에 순전히 사와무라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실없이 웃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일까 조금 기분이 풀린 쿠라모치에게는 처음 기숙사에 있다가 집으로 내려가던 때를 기억해 볼만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금 오랫동안 전철을 타고, 한동안 걷지 못한 길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쓰지 않은 열쇠로 문을 열었던 것은 기억한다. 사와무라의 귀성길은 어땠는지 쿠라모치는 알지 못한다. 그는 나가노까지 걸리는 시간도 알지 못하고, 사와무라가 역에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 그러셔.”

그리고 사와무라는 알 필요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와무라가 보낸 문자 때문에 핸드폰이 알림등을 깜박거린 덕에 쿠라모치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확인했다는 것이나, 그것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얼토당토않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몰라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에는 잘 들어갔고.”
“당연하지요! 앗 모치 선배도 잘 도착했지요? 그거 알아요, 오늘은 모처럼 집에서 늦잠 좀 자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늘어지면 어쩔 거냐고 새벽부터 깨운 거? 거의 일 년 만에 집에 왔는데 하루 정도는 좀 늦게 일어나도 되잖아요? 아, 그래도 덕분에 어제 선배한테 잘 도착했다고 고맙다는 문자 안 했다는 게 생각나서—”

쿠라모치는 키득거리면서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 중간 응, 그래?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수화기를 대지 않은 쪽 귀로 그대로 빠져나갔다. 저 집도 할아버지인가, 라는 생각에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쿠라모치의 할아버지는 기숙사 기상시간에 맞춰서 쿠라모치를 깨우지는 않았기에 그 점에서는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뒤에서 너희 엄마한테는 비밀로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 하자며 그래서 여자 친구가 누구냐고 물어온 것도 할아버지였다. 물론 쿠라모치에게는 정말로 여자 친구 같은 것은 없었기에 비밀로 할 이야기도, 정말, 없었다. 아직은. 아파트를 빠져 나온 지 조금 지났는데도 사와무라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쿠라모치를 알아본 아는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도 그랬다.

“요이치! 언제 돌아왔어?”

멍하니 고정되지 않은 시야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쿠라모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야, 끊어야겠다. 나중에 보자.”
“아, 나중에 기숙사에서 봐요.”

사와무라에게 급하게 건넨 말은, 똑같이 무정한 대답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본 친구와 악수를 나누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 쿠라모치는 생각했다—그래, 내가 쟤한테 뭘 기대하겠어.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자조를 지으며 그는 묘하게 밝게 들린 것 같은 사와무라의 목소리를 잊기로 했다.

 

#

쿠라모치가 문 앞에서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같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을 잡았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몇 분 동안 현관 문 앞에서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서있는 두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신고할지도 모른다.

“모치 선배, 아까부터 계속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거 알아요?”
“응, 알아. 긴장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쿠라모치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사와무라도 알 수 있었다. 손을 조금 뻗어서 새끼손가락만이 아닌, 네 손가락을 모두 붙잡아 보았다. 땀 같은 것은 흐르지 않았지만, 손이 말라있어서 더 불안했다.

치바와 나가노 두 집 중, 단순히 치바가 더 가깝다는 이유로 이곳에 먼저 왔지만 솔직히 사와무라는 나가노에 먼저 보고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잘 될 거라는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것은 물론 아프기야 하지만 익숙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것보다는 더 아플 것이었다. 어머니는—어머니는 정말로 울지도 모른다.

사와무라는 두어 번, 쿠라모치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쿠라모치가 소개해준 적도 있다. 쿠라모치와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은 어머니와, 조금 닮은 것 같은 할아버지 두 사람이었다. 경기장에서 유니폼 차림으로, 90도로 인사하는 사와무라에게 두 사람은 이런 선배랑 같은 방이라니 고생이라고 말하며 웃어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두 분들은, 이제 와서 같은 기숙사 방을 쓰는 후배가 아니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와무라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사와무라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숨소리에 쿠라모치가 손을 꽉 잡아왔다. 그리고 그가 결심한 듯이 초인종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문 앞에서 뭐하고 있는 거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와무라는 고개를 돌렸다. 아—복도에 마침내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를 생각하는 동안, 쿠라모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집에 왔으면 들어가 있지. 손님을 데려와서는 여기 세워두기나 하고 뭐 하는 거야.”

퇴근길인지, 한쪽 어깨에 멘 가방에서 열쇠를 꺼낸 그녀가 쿠라모치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문을 열었다. 사와무라가 잡았던 손을 떼어내려고 하던 차였다. 그녀는 사와무라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지요, 사와무라 군. 어서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