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나가노 사와무라네 방에서 자게 된 쿠라모치

 

사와무라에게서 같이 나가노에 놀러가지 않겠냐는 전화가 온 것은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사와무라가 고시엔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고시엔 기간 동안 도쿄를 떠날 수 없었던 (거기에 고생을 하며 경기를 관중석에서 볼 기운도 없었던) 쿠라모치는 몇 번 문자를 한 적이 있었다. 그룹채팅방에 있는 후배들에게서는 한마디씩 감사하다는 답을 들었지만 사와무라에게서는 예상대로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쯤 되어야 폴더폰에서 벗어날 건지, 쿠라모치가 그런 불평을 하는 사이에 일정은 진행되었고 사와무라는 도쿄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간만에 걸려온 전화에 쿠라모치는 반갑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답했다.

“싫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쿠라모치가 거절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사와무라는 크게 당황하는 모습 없이 끈질기게 쿠라모치를 설득했고,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는데다가 사와무라가 매달리는 목소리가 길어지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던 쿠라모치는 알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갈까 말까 하며 약을 올리는 것을 이어갔다.

“선배는 교통비만 챙기면 돼요. 우리 집에서 잘 먹여줄게요!”
“콜. 언제 갈 건데?”

내심 날짜가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사와무라가 귀성하겠다는 날짜는 쿠라모치의 일정도 비어있는 날이었다.

 

치바와 도쿄는 가까운 편이었고, 야구부에서 오사카까지 이동할 때는 언제나 버스였기에 신칸센을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을 빠져나가자 두 사람이 앉아있는 칸은 금방 조용해졌다. 사와무라에게 창가자리를 양보 받은 쿠라모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사와무라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부른 이유가 뭔데?”
“아니 뭐, 쿠라모치 선배랑 저 사이에 이유 같은 게 필요합니까. 그냥 선배 이번 여름에 아무데도 안 갔을 거 같아서…….”
“거짓말 말고. 네가 뭔가 필요하니까 나를 불렀겠지.”

그것이 무엇인지가 문제였지만, 더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자신을 부른 것을 보면 무언가 대단한 건지도 모른다고 쿠라모치는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신음소리를 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이번에 우리 동네에서 응원을 꽤 많이 와주셨거든요. 제 마지막 고시엔이라고.”
“응.”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경기는 넘어가도 세이도 경기는 꼬박꼬박 챙겨보았던 쿠라모치는 아나운서가 알프스석에 있던 나가노에서 왔다는 사와무라의 중학교 시절 선생님과 마을 사람들을 (그중에는 쿠라모치가 고등학교 시절 사와무라의 여자 친구라고 오해했던 와카나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던 것도 보았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인복은 어지간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런 거 처음이기도 하고—혼자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 같아서요.”
“왜,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겸손한 척하면서 너 자랑하는 거.”
“내가 언제 그랬다고요?”
“소리 좀 낮춰. 너 1학년 때부터 잘 그랬잖아.”

쿠라모치의 말에 사와무라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번에는 엄마도 오라고 했는데…… 걱정되잖아요. 여름에 집에 돌아가는 건 처음이라고요.”
“거기까지 응원 가줬던 분들이면 그런 걱정 안 해도 괜찮잖아?”

쓸 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며 쿠라모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댔지만, 사와무라는 여전히 나가노에 도착한 다음이 걱정인지 계속 얼굴이 어두웠다.

이미 여름은 끝났다. 아직도 고등학생인 애한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쿠라모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를 불렀지만,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들은 쿠라모치는 나가노에 도착하면 자신은 불청객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쯤은 그랬다. 마을로 들어서는 역을 빠져나가자마자 사와무라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어졌다—그리고 거기에 하나하나 인사를 하며 반응을 보이는 사와무라의 뒤를 따라서, 없는 사람인 양 걷고 있자니 심심하지는 않았다. 결국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 탓에, 사와무라의 집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있었다.

사와무라네 집은 버스에서 내린 다음에도 시골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야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관리되어있는 나무들이 서있는 마당을 지나고, 옆으로 마루가 나있는 집의 현관으로 들어간다. 할아버지와 한 집에 살던 쿠라모치는 방학이 되어서 시골집에 내려가 본 기억이 없었지만, 아마 이런 게 상상으로나 하던 시골집의 모양인지도 모른다. 사와무라가 살던 집이라고 생각하면—생각보다 으리으리했지만. 현관에서 들어와서는 또 2층으로 올라가야 사와무라의 방이 있었다. 침대에 텔레비전에, 방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테이블이 하나. 방주인이 없는 사이에도 청소를 해 주신 것인지,

“기숙사 방보다는 깨끗하네.”
“엄마가 다 치워서 그래요.”

옷가지만 들어가 있어서 가벼운 가방을 내려놓고 사와무라는 소파에, 쿠라모치는 바닥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렸다.

저녁시간이 되자 사와무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진 것인지 사와무라네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며, 사와무라는 다시 바빠졌다.

 

사와무라가 친구들에게 잡혀있는 사이 쿠라모치는 슬쩍, 사와무라의 어머니 덕분에 먼저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워서 티비를 보다가, 그것이 지루해지자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있던 과월호 고교야구 잡지를 꺼내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몇 권 째였을까, 몇 년 전의 미유키가 실린 서도쿄지구의 기사를 보고 피식 웃고 있자 사와무라가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내쉬는 것이 여간 지친 모양이었다.

“오, 수고했어.”

느긋하게 인사를 건네자 사와무라는 바닥에 누워있는 쿠라모치를 내려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쿠라모치 선배, 거기서 구해줄 줄 알았는데. 배신자.”
“아니 와카나였잖아. 와카나랑 얘기하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선배 이번에도 그냥 와카나라고 불러보고 싶은 거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 웃자 사와무라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침대로 향해서, 풀썩 침대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베개에 막혀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피곤하게 들렸다.

“와카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 친구 분들도 오셔가지고—쿠라모치 선배, 우리 내일은 좀 멀리 놀러가요.”
“그러던가. 그래도 저녁때는 올 거지? 너희 어머니 음식 맛있더라.”

 

시골의 밤은 시끄러웠다. 쿠라모치보다 조금 높은 곳,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사와무라가 조용했다. 시끄럽다고 생각되는 목소리가 멈추자 그 전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날카롭게 귀를 때려왔다. 밖에서는 또르르르 울리는 소리, 찌르르르 끊겼다가 다시 길게 이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소리,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동물들이 짖는 소리. 창밖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 이번에는 옆에서 들려오는 숨 쉬는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시간은 벌서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낮에 걸었던 것으로는 지치지도 못하는 것일까, 쿠라모치는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아까 이후로 다시 켜지지 않았고, 1층에서 자는 사와무라네 가족들도 모두 잠든 것인지 바닥으로도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사와무라의 작은 소리가 커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있던 사와무라는 그새 뒤척였는지 쿠라모치가 누워있는 위치에서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사와무라.”

침대 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쿠라모치는 등을 돌리고, 한쪽 귀를 베개에 꼭 붙였다. 그런데도 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쿠라모치는 내일의 일정을 조잘거리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되도록 멀리 가자며 낯선 지명을 말했다. 머릿속이 글자로 소리로 가득 차서 그 이상의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지자, 쿠라모치의 기억도 끊겼다.

 

사와무라의 여름 귀가가 끝나고 도쿄로 내려가는 길에, 쿠라모치는 다시 창가 자리에 앉아서 다시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나가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열차 안에서 사와무라의 어머니가 싸주었던 도시락을 먹으면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진로는 정했어?”
“음—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버지랑 얘기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그래.”

쿠라모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와무라가 어떤 길을 택할지 쿠라모치는 알지 못하고, 그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참견은 하지 말아야 했다.

“어떻게 되던지—너랑 예전처럼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는 것도, 괜찮을지도.”
“아, 그거 좋겠네요.”

주먹밥을 밥을 꿀꺽 삼키고 사와무라는 대답했다. 그때는 이층 침대는 내 거! 라고 한마디를 덧붙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