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사와, 미래날조

크리스가 미국에 있으므로 인해 생긴 불편함에도 익숙해졌다. 시차가 애매하게 맞지 않아서 주말이 아니라면 통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주말이라면 조금 늦게 잠들어도 괜찮아서, 저녁 시간에 가끔 화상통화를 켜놓을 때도 있었다. 문자라면 자주 했다. 아직도 사와무라는 문자에 답을 하지 않는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지만, 문자 아래에 작게 ‘읽음’이라는 표시가 뜨는지 확인하게 되는 일이 늘어났다. 보내는 시간과 받는 시간이 한참이나 차이가 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못할 것만 같은 스마트폰이었지만 적어도 문자를 치는 데에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문자를 볼 때마다 가끔 사와무라는 크리스의 손 안에서 더욱 작아보이던, 똑같이 생긴 전화를 기억한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짜가 정해졌다는 말을 하던 날, 전화를 새로 사주었다. 사와무라가 거절할 것을 예상했는지 크리스는 다른 게 아니라 국제전화니, 이메일이니 하는 것보다 그걸로 연락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는 이유를 댔다. 확실히 편하기는 했다. 시간대가 틀리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역시 숨길 수는 없었네. 크리스가 새로 보낸 문자를 받은 사와무라가 제일 처음 떠올린 것이었다. 사와무라는 크리스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크리스가 보내주는 문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야구를 보는 것 보다 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와무라에게 미국의 야구계는 너무나도 크고 넓었고, 불행히도 크리스가 속해있는 팀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전하는 뉴스는 없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크리스의 활약을 자세히 찾아보기에 사와무라의 영어실력은 턱없이 모자랐고, 따라서 시간 또한 부족했다. 반면에 크리스는 용케 사와무라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와무라가 자신이 매우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상으로 재활 중이라는 사실을 사와무라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3주, 나름 오랫동안 숨긴 건지도 모른다. 문자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크리스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와무라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화를 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선배라면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다만, 그저, 최근 들어서 자주 떠올랐다.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후루야가 등판한 경기를 내려다보던 스탠드에서, 통로를 통해 뒤돌아가던 모습과 그 후에 한 번, 그때는 다른 상황 다른 분위기에서 무리하지 말라는 투로 한 말. 사와무라는 자신이 회복해서 복귀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야구 인생이 걸린 중상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지나간 시절의 단편이 찾아오는 빈도가 증가했다. 처음부터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얘기하지 못했을 뿐이었지만 한 번 시기를 놓치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크리스에게서 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좋은 이야기뿐이었기에 괜히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복귀하면 말하려고… 문자를 치던 와중에 크리스에게서 온 문자가 새로 나타났다.

사와무라가 걱정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크리스는 다 알고 있었다. 부상이라는 것도, 재활중이라는 것도, 어째서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재활을 해야 하는지도. 다만 사와무라에게는 고민할 것이 생겼다. 놀러오라니—생각해 본 적 없는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로 문자만 바라보다가 사와무라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 답변 없음을 오해한 것이 분명한 크리스는 그 사이에 몇 번이나 문자를 했고 아침, 사와무라가 옆구리 아래에 깔려있던 전화를 주워들었을 때는 붉은색이 된 배터리바와 함께 부재중 문자를 고지하는 팝업이 떠있었다. 답이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에 사와무라는 가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비행기 표를 사주지 않았어도 분명 그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어떻게든 갔을 것이다. 이제야 크리스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도 듣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저렇게 대답한 이상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날 아침만 하더라도 사와무라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여권이 없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고,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에 공항에서의 출입국수속 과정이나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서 열 시간이 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끝에서 만날 사람에 대한 기대만이 있었다—그런 현실적인 준비과정은 잠시 부재중일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자리에서 바보취급을 당한 후에야 떠올랐다. 집에 도착했을 때, 돌아오던 길에 지하철에서 찍었던 증명사진을 꺼내놓은 사와무라는 정면에서 찍은 자신의 모습이 아무래도 어색한 것인지 피식 웃고는 옆에 내려놓은 폰을 집었다. 오늘은 크리스에게서 아무런 문자가 없었다. 덜컥 증명사진을 찍은 것을 먼저 보내고는 잠시 뒤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 변했다고 못 알아보면 안 됩니다 선배.

정작 사와무라야말로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크리스를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차를 운전하는 옆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차가 없으면 생활할 수가 없어서, 크리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사와무라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른스러웠던 선배가 정말로 어른이 된 것 같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미소를 지은 채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크리스는 분명히 이전과 같은 얼굴이었는데, 오늘 하루 갑자기 처음 보는 모습이 늘어났…….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사와무라를 바라보며 크리스도 웃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잠은 다 잤어? 서, 선배. 사와무라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으며 머뭇거리다가 겨우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오랜만이라서 자는 거 보고 있었어. 뭐, 변했다면서 하나도 안 달라졌네. 자신과는 달리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크리스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사와무라는 괜히 이미 잠이 다 달아난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피곤하지? 네. 오늘은 푹 쉬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버린 것 같은데 더 쉴 수는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잠깐,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다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사와무라는 크리스 선배 보겠다고 미국에 가도 말 안 통해 운전도 못 할 것 같아, 해서 기껏 선배네 집 가서는 외로움 타는 게 보고 싶었는데 이야기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 포기, 달달하게 지내라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