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23권에 작게 등장한 섬유유연제 이야기랄지…

 

방 안에 두는 빨래바구니에 모아둔 세탁물을 집어서 세탁기에 넣을 때마다, 연습 때 묻은 땀 냄새가 손에 배어날 것만 같았다. 빨래를 하는 주기가 길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랬다. 매일 반복되는 연습 때문에 금세 쌓이는 티셔츠에 운동복에 속옷. 운동부, 기숙사, 남자 고등학생들의 단체생활. 그렇게 보자면 넓지 않은 세탁실을 채운 세탁기와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새삼 비참하게만 들렸다.

세탁기 앞에서 할 일 없이 기다리는 부원들은 없었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혹은 확인하는 척 대충 훑어보고는 식당을 향하거나 방으로 돌아가거나 그런 후에 다시 자율연습이라는 자유시간을 가진다. 쿠라모치는 마주치는 부원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쿠라모치의 근처에서 발생하는 시끄러움의 원흉은 지금도 그라운드를 뛰고 있는지, 저녁 식사 후에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분명히 오늘도 귀가는 늦을 것이다.

기숙사에서는 지쳐 있다거나 졸린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수업 중에는 자주 조는 모양인지, 감독이 찾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와무라는 수업 중에 잔 것을 혼내려는 것인가 하고 지레 겁을 먹곤 했다. 하지만 사와무라가 수업 시간 동안 폭면을 취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침 훈련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취침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기숙사 생활이건만 자정을 넘겨서까지 연습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봄에 쿠라모치의 방에 들어온 후배는 더는 아침 연습 시간에 지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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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들이 들어온 아침훈련 첫날 화려한 지각, 그 후에 감독에게 요란하게 소리친 것으로 부활동을 시작한 사와무라에게도 기숙사 생활의 첫 난관이 찾아왔다. 게임기를 붙들고 있는 쿠라모치에게 들으라는 듯이 사와무라는 서랍장 앞에서 이제 교복 말고는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어떡하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를 반복했다. 바보냐,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못 이긴 척 쿠라모치는 게임을 종료하고 콘트롤러를 내려놓았다. 문가로 걸어가서 신발을 신고, 선반 위의 플라스틱 통과 세제 곽을 턱으로 가리켰다. 빨래할 거랑 저거 들고 따라와. 금방 표정을 환히 밝힌 사와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세제도 섬유유연제도 어디에 넣는지는 물론, 세탁기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도 모르는 사와무라를 보며 쿠라모치는 도련님이 따로 없다며 혀를 찼다. 그렇지만 1년 전의 쿠라모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혼자서 빨래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치바에서 올라온 그도 처음에는 학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입장이 바뀌었을 뿐, 일 년 전의 일이 반복되었다.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드럭스토어까지 사와무라를 끌고 가서 무엇을 사두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지난번에 썼듯이 세제와 섬유유연제. 계산대로 향하는 와중 매대에 놓인 것 중 필요할 만한 것을 가리켰지만, 그런 것들은 본인이 알아서 챙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숙사에 들어가고 처음 집에 내려갔을 때, 쿠라모치가 세탁기 근처 선반에 놓인 세제와 섬유유연제 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어머니는 기숙사 생활을 하니 이젠 혼자서 빨래도 하겠네, 하고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좋은 거 사서 써. 에이 비싸잖아.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은 다른 데에도 들어갈 일이 많다고 쿠라모치는 투덜거렸다. 이게 얼마나 한다고, 옷에서 냄새나게 하고 다니는 것보다야 낫지. 어머니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짧은 휴일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 마침 떨어진 비품을 채우기 위해서 나온 쿠라모치는 하늘색 플라스틱 통과 리필용 봉지, 그리고 화사한 색의 용기를 눈앞에 두고는 고민했다. 한참을.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요이치 너 전에는 담배냄새도 묻히고 다녔잖니, 엄마가 그런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아무렇지 않게 이전 일을 끄집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빨래는 너무 널어두지 말고 꼭 제때 걷는 거 잊지 말고. 계산을 끝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 건조기 있어. 물론 다 마른 세탁물을 잊고 건조기에 방치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빈 건조기를 찾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일일이 빨래를 널고 개는 시간조차 사치일 때가 많았다.

선배 저 빨래해야 하는데. 어, 그래서? 저 세제가 떨어져서—선배 거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쿠라모치가 사와무라를 돌아보았을 때 사와무라는 이미 문간에 있는 서랍장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대답하고는 쿠라모치는 다시 콘트롤러를 잡았다. 선배 거 어떤 거지요, 이거? 아냐 거기 노란 통이랑, 중간에 있는 상자. 에, 이거 마스코 선배 거인줄 알았는데! 마스코 상은 그거 쓰면 너무 빨리 닳는댔어, 아 아껴서 써라. 넵! 우렁찬 대답소리를 이어서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에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후에 사와무라가 돌아왔다. 또다시 요란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빨래 바구니가 바닥에 놓이고 선반 위로 세제와 섬유유연제가 놓였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잡지를 읽고 있는 쿠라모치의 옆을 지나쳐서 침대 위로 빨래를 쏟아 놓고는 침대 위에 앉아 그것들을 하나하나 개기 시작했다. 옷에는 부드러울지 모르지만, 코에는 조금 날카로운 섬유유연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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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더 비어있는 듯이 느껴지는 방 한가운데에 사와무라는 서 있었다, 놓여있었다. 눈동자가 비어있는 것이,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사실이 쿠라모치에게는 불편해다. 가뜩이나 빈자리가 생긴 5호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시간을 잃고 멈추어 있는 것 같다는 식상한 표현이 떠올랐다. 쿠라모치는 그 속에서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움직여야 할 것이 움직이지 않았고 중력이 사라진 곳에서 일상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방문을 열고 5호실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쿠라모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달의 공기는 끈적이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들의 여름이 끝났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이틀간의 휴일이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집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와 이틀간을 같이 해야 했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마음이라도 조금 편할 것이었지만—그날 저녁, 식당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사와무라를 보고 그것이 기우였다고 마음을 놓았다.

쿠라모치의 섬유유연제가 다 떨어졌다. 연습경기 때문에 나갈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 때문에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것을 빌리기로 했다. 그 날이 두 번째였다. 하늘색 통은 분명히 가게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싼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 쿠라모치가 쓰던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이제 와서는 상표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미팅이 끝나고 쿠라모치는 복도에 널어둔 교복 셔츠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마스코가 쓰던 침대에 옷걸이 채로 걸어두었다. 건조기를 써도, 방 안에서 말려도, 세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먹먹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오늘도 바로 운동장으로 향했고 돌아오는 것이 늦었다.

무리하면 부러진다는 충고를 다시 해 줄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를 포함한 3학년들은 이미 은퇴했고, 남은 부원들은 스무 명의 엔트리 안에 들기 위한 경쟁으로 바빴다. 미유키는 이대로는 부족하다고 말했고,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 사와무라는 돌아왔다. 조용히 문을 연다고 했지만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와서 티가 났다. 처음에는 쿠라모치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낯익어서, 잊고 싶은 냄새가 어디에서 들어오는 것인지. 들여다보지 말 것이라는 경고문을 붙여놓은 유리창 안을 메우던 아슬아슬한 위험과 고립. 야구부실 안은 담배 연기로 차 있는 일이 많았고, 가끔 거기에 땀 냄새로 착각할만한 희미한 피 냄새가 섞여 있기도 했다. 그 공기를 없애기 위해서 몇 번 환기를 시켜 보았지만 방 안 공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그때보다 배는 늘어난 훈련량에 당연히 흐르는 땀, 옷에 묻는 흙먼지, 배트의 쇳내, 글러브의 가죽,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한계까지 몰린 신체. 그런데도 멈추는 일은 없었고, 따르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최소한의 자유시간만이 남아 그럴 분위기를 바꿀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커튼을 열어 놓아도 방 안으로 해가 충분히 닿지 않는 거 같았다. 날짜는 아직 여름이었고 해는 길었고 올해는 유난히 맑은 날이 많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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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무라는 경기 전날부터 자신이 하레오토코라고 단언했지만, 비가 그치고 해가 뜬 것은 경기가 다 끝나갈 때였다. 우천 경기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쿠라모치는 옷을 벗고 가볍게 목욕을 하고, 유니폼을 포함한 빨래를 돌렸다. 세탁하러 가는 거면 같이 나가자며 막 목욕탕에서 방으로 돌아온 사와무라도 빨래바구니를 들고 뒤를 쫓았다. 쿠라모치는 아직도 쇼핑을 하지 못했고, 사와무라의 세제 통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내일 경기가 끝나면 같이 나가서 사자.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수건도 빨아야 하는데! 급히 세탁기 뚜껑을 열고 젖은 수건을 넣는 모습을 보며 쿠라모치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쿠라모치가 선반에서 섬유유연제 통을 집어 들자 사와무라가 피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생각하는데 그거 선배가 쓰기에는 귀여워 보이는 거 아ㄴ…. 입 다물어라. 맞잖아요, 선배가 그런 거 사는 거 안 어울리는데. 어머니가 잔소리가 심해서 그래. 오오, 선배 그런 면도 있었… 입 다물라고 했지?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는 터덜터덜 걸어오는 길이었다. 사와무라는 시끄러웠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어쨌든 시끄러웠기에 옆을 걷는 다리를 가볍게 걷어찼지만 아프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겨우 조용해지나 했을 때에 사와무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기숙사에 오기 전에는 이런 거 써야 하는지 몰랐는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쿠라모치에 대한 것이 아닌 것 같았기에 쿠라모치는 가만히 듣기로 했다. 그것을 무언의 질문으로 해석한 것인지 사와무라는 덧붙였다. 섬유유연제 같은 거 말이에요. 아, 너 도련님이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어릴 때는… 엄마가 저녁때 빨래 좀 걷어오라고 시킬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마당에서 빨래 마른 걸 가지고 들어올 때마다 따뜻한 냄새가 나서, 빨래는 그냥 널어두면 좋은 냄새가 나는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내려다보는 사와무라를 보며 쿠라모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당에다 빨래라니 자랑하는 거지? 뭐가 자랑이라는 거예요, 그냥 그런 줄 알았다는 건데. 팔을 목에 두르고 조르자 사와무라는 또다시 투덜거리면서 과장되게 캑캑 댔다. 경기장에서, 벤치에 앉기 전에 관중석을 향해 소리지르려는 것을 막았을 때, 그렇게 소리지르는 모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분명히 있었지만. 적당히 양지바른 곳에서 말라 구김 없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