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쿠라사와의 소재 멘트는 ‘결혼하자’, 키워드는 손톱자국이야.
애석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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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진단메이커 결과에서 소재 멘트만 따와서. 여전히 바이크 레이싱au. 지난 글이랑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n년 후 설정이라는 느낌으로.

 

일요일의 웜업 세션이 시작하는 것은 아침 9시 하고도 20분이나 지나서였다. 트랙온도는 기온과 같은 21도, 비가 올 확률도 없어서 쾌청한 드라이 레이스가 예상되었다. 개라지에는 평소의 인원들과 몇몇 VIP 손님들이 있을 뿐, 정작 쿠라모치가 패스를 건네준 당사자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침에 먼저 모터홈에서 나왔을 때는 그래도 이 시간이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햇빛을 받아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라임그린 바이크에 올라탄 쿠라모치는 바이저를 내리고 혀를 찼지만 그 작은 소리는 엔진음에 묻혔다. 그리고 세션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뒤로하고 피트를 빠져나가면서 그런 불평은 모두 잊었다.

 

사와무라가 마니쿠르 서킷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밤이었다. 서킷 근처에 도착한 정확한 시간은 쿠라모치의 핸드폰에 남아있을 것이다. ‘모치 선배, 느베흐까지는 왔는데요, 여기서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전화를 받은 시간. 그리고 차를 몰고 역에 도착해서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어보자 슬금슬금 입구에서 사와무라가 가방 하나를 매고 걸어 나오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간도.

쿠라모치를 발견했는지 전화를 끊고는 달려오려다가, 목발을 떨어뜨린 바람에 그러지 못하는 사와무라를 보았다. 피식. 사와무라가 바닥에서 목발을 잡고 있는 사이에 쿠라모치가 먼저 사와무라에게 다다랐다.

“너, 그 꼴로 온 거냐?”
“아아, 괜찮아요. 어제 병원에서 다음 경기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들어서, 선배한테도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잘 됐네. 그런데 목소리는 좀 줄여라.”

차 저기다 세웠으니까 가자. 사와무라의 빈 팔을 잡고 쿠라모치는 그를 잡아끌었다. 안 와도 괜찮았는데, 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금방 항변이 돌아왔다. 선배는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꼴은 좀, 하는 말은 입 밖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사와무라는 한 달쯤 전에 체코에서 있었던 크래쉬 이후 다리를 다쳐서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크에는 타 보지도 못하고 있어서 심심하다고 투덜거리고 있기에 그럼 구경 오는 것도 싫겠다? 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정말 올 것이라고 쿠라모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온 것 까지는 좋았지만, 사와무라는 일요일 웜업 세션도 놓치고 여전히 침대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시끄러운 데에서 잘도 잔다는 한숨과, 그럴 만도 하지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앞머리를 넘겼다. 섹스는 챔피언의 아침식사라고 했던 어느 에프원 챔피언이 있었는데 그 말대로가 아니더라도 레이스 주간의 밤사정은 각양각색이라는 것을 쿠라모치는 알고 있었다. 굳이 쿠라모치가 그런 사정을 묻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슬슬 일어나지 그래?”
“몇 신데요?”
“열한 시 넘었어. 너 깨우러 왔다.”

정말로 잠깐 들어온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라이딩수트도 채 벗지 못한 것을 보면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짬을 내서 온 것이 분명했다.

“오늘 추워요?”
“아니, 날씨 좋아.”
“맨날 여기서는 비 온다고 해서 옷도 가져왔는데.”
“어차피 박스에 있을 거면서.”

그건 그렇지만, 사와무라는 기지개를 피고는 눈을 비비고 손을 그대로 이마 위에 얹었다. 아직도 졸린 것인지 깜빡거리는 눈은 조금 멍한 채였다. 쿠라모치는 나른하게 놀고 있는 사와무라의 오른손을 잡아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사와무라, 우리 결혼할까?”

여전히 입술과 손이 가까워서 미지근한 숨결이 살결에 닿았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 말에 사와무라도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선배가 우승하면요.”
“그래?”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에 쿠라모치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이불 안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사와무라를 내려다보며 쥐고 있는 손의 약지를 깨물었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손가락 끝, 손톱 아래, 둘째마디로 느껴지는 이빨, 물컹한 혀와 입술에 감싸였다가 빠져나온 손에는 잇자국이 남아있었다.

“싫다는 소리 같다, 그거?”
“그런 거 우승한 다음에 물어봐야 하는 거 아녜요? 별로 싫ㅇ……”
“됐어. 옷 입고 일어나기나 해.”

사와무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쿠라모치가 일어났다. 개라지로 돌아가지 않고 모터홈에서 계속 꾸물거리고 있다간 우승이든 뭐든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방을 나가려는 쿠라모치를 향해 사와무라는 소리쳤다.

“모치 선배 삐졌어요?”
“아니. 우승—해 줄게, 뭐.”

문을 닫고 나가면서 쿠라모치는 자신 만만하게 답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마니쿠르 전적을 떠올려 보고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우승을 하겠다고 했으니 조금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 옆에 내려둔 목발을 찾았다. 시즌 최종전인 오늘, 쿠라모치의 기회는 두 번. 오늘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사와무라가 복귀전에서 우승을 노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