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아랫글에서 이어지는 거.

 

프랑스에서 스페인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와무라는 바빠졌다.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병원 방문 시간을 체크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프시즌이 시작된 쿠라모치와는 달리 사와무라의 캘린더에는 아직도 경기가 넷이나 남아있었다. 3주간 세 번의 경기가 예정된, 시즌 후반의 제일 바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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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1 시작도 아슬아슬하게 맞추었기에 사와무라에게는 스타팅 그리드를 구경할 시간도 없었다. 조용히 개라지 한구석에 앉아 개라지에 설치된 화면으로 경기를 구경했다. 오늘도 쿠라모치는 좋은 스타트를 보였다—본받을 만한, 그렇지만 여전히 따라할 수 없는. 그렇지만 랩 7, 코너링 중 미끄러진 바이크가 그대로 그라벨 베드에서 멈추지 않고 타이어 월까지 가서 부딪혔다. 마셜들이 쿠라모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와무라는 그 다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다. 목발을 집는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간 사와무라는 그대로 건물 벽에 기댄 채로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앞으로 몇 랩이 남았던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여기서 뭐해?”

이쪽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쿠라모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와무라는 옆에 세워둔 목발을 건드렸다. 스쿠터를 타고 온 게 아니던가, 어디서부터 걸어왔지 하는 생각을 하며 쿠라모치가 목발을 줍는 것을 바라보았다. 목발을 손에 쥐어준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들어가자. 나 멀쩡하니까.”

물론 바이크는 멀쩡하지 않았다. 레이스 2가 시작하기 전까지 메카닉들은 쉬지도 못하고 수리에 매달려야 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쿠라모치도 바빴다. 엔지니어들에게 둘러싸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래쉬했던 코너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한 세팅 이야기일 것이라고 사와무라는 짐작했다. 이곳에서는 관찰자인 사와무라는 가만히 바쁘게 돌아가는 주변 상황을 지켜보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또 다시 개라지를 빠져나가서 패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쿠라모치의 경기에 구경을 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이 분위기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를 알아본 팬이라는 사람들에게서 사인을 부탁받고,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진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어색함을 떨치지 못했다.

레이스 2에서는 스타팅 그리드를 구경할 수 있었다. 멀찍하니 바라볼 뿐인데도 바이크 위의 쿠라모치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마지막 경기였다. 우승이라니 역시 너무한 부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드에서 나가기 전 사와무라는 말을 건넸다.

“선배, 우승은 안 바라고요—”
“야—”
“완주나 해요. 또 미끄러지지 말고. 비도 안 오는데.”

이어진 말에, 아직 바이저를 내리기 전의 헬멧 안으로 보이는 눈이 조금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카무라.”

사와무라는 그 닉네임에 피식 웃으면서 쿠라모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말고 제대로 보기나 해.”

그렇지만 마니쿠르에서 우승을 해 보이겠다던 쿠라모치의 결과는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상성이 좋지 않은 서킷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괜히 도발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슬슬 프랑스전에서도 우승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결과는 올해도 실패. 우승자의 기쁨이 챔피언 결정에 묻혀버리거나, 경기 우승자가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결과. 종종 있는 일이지만 역시 그런 경기는 보고 있기에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사와무라는 이런 최종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쪽이었만, 첫 타이틀 획득에 성공하며 포디엄 피니쉬가 아닌데도 포디엄에 올라간 쿠라모치를 바라보며서 쓴웃음은 속으로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파크퍼메에서는 한발자국 물러서 있었지만 제대로 모두 보았다. 포디엄에서 내려오는 것까지 모두. 쿠라모치의 팀이 챔피언쉽 획득을 축하할 일만 남아있었다. 우승팀의 개라지에는 가족들과 크루들과 사진사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쿠라모치의 경우 대부분 가족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사와무라는 망설이다가 먼저 쿠라모치의 모터홈으로 향했다. 옆에서 구경하다가 샴페인에 젖는 것은 싫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채널들을 돌리다가 게임기를 연결했다가, 그것도 지겨워져서 사와무라는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트위터에 오늘 경기 결과에 대한 트윗이 가득이었다—타임라인에 크래쉬 사진이 보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화면을 스와이프했다. 쿠라모치가 돌아온 것은 핸드폰 배터리 아이콘이 빨간색으로 바뀌어서 충전하라는 메시지를 띄운 후였다.

“제대로 보라고 했는데 또 어디 갔었어?”
“다 봤어요.”

6위로 끝냈으면서 포디엄이라니 이상하더라고요. 침대로 올라온 쿠라모치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사와무라는 중얼거렸다. 언제 만들었는지 챔피언 기념 티셔츠까지 챙겨 입고 있는 쿠라모치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서도 샴페인 냄새가 배어났다.

“우승 못해서 삐졌어?”
“그건 아니고—선배도 싫었구나 싶던데요.”
“야 그건 아니거든?”
“……차라리 경기 끝나고 얘기하지.”

옆에 누운 쿠라모치를 끌어안으면서 사와무라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쿠라모치도 아쉽다는 듯이 답했다. 그렇게 됐네. 보통 그렇다. 부인이나 여자 친구가 경기를 구경하러 올 때면 보이는 장면이다. 우승한 선수가 파크퍼메에서,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부러울 정도로 예쁜 장면이었다. 물론 그런 것은 불가능하지만. 경기 끝나고 말했더라면, 그런 심술은 부리지 않았을 텐데.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선배가 나 우승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햣하하, 네가 말이지…….”
“엑, 그 반응 뭐예요.”
“아니, 잘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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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것이 오른쪽 다리였기에 목발을 짚고도 손을 쓰는 데 불편함이 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복귀전인 필립 아일랜드가 왼쪽 코너가 더 많은 서킷이라는 사실에 그것이 다시 한 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아직도 목발을 짚어야 하지만 적어도 다리에 많이 무리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경기 전까지 크래쉬하지 않는 것. 스쿠터로 트랙을 돌아본 사와무라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3일 후의 복귀전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다음 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쿠라모치를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