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썰로 풀었던 거. 고교시절, 고백.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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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 위로 들리는 게임의 배경음악이 멈추는 일도 없었고, 게임오버를 알리는 효과음이 들리지도 않았다. 대답은커녕 ‘같아요’는 뭐냐는 태클이 걸려오지도 않았다. 사와무라는 만화책을 한 장 넘겼다. 여전히 쿠라모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다가, 겨우 대사를 다 이해한 사와무라는 다시 만화책을 한 장 더 넘겼다. 그것이 몇 번 더 반복되었고, 책을 덮었다. 사와무라가 새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쿠라모치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텔레비전을 끄고 방에서 나갔다. 쿠라모치가 없는 방에서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만화책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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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5호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수업이 끝나고 연습 일정이 끝나서 다시 5호실로 돌아오는 저녁 시간에도, 겉보기에는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한 달이 그렇게 지나자 사와무라는 그날 쿠라모치에게 실제로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을 하려고 생각만 했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도 애매함도 나날이 일상에 희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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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빌려본 만화책의 신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번 얘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신간을 돌려볼 차례가 오기 전에 읽겠다고 전편을 몇 권 빌렸다. 처음부터 다 봐야 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들어오니 쿠라모치는 다른 방에 가있는 모양이었다. 사와무라는 침대에 기대서 만화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날 몇 번이나 돌려보던 페이지를 마주했다. 이번에는 인쇄된 대사는 한 번에 읽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났다. 제대로 말 한 거 맞잖아. 그렇지만 그걸 확인해보고 싶은, 확인할 수 있는 상대는 방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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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들렸다. 실제로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쿠라모치는 자판기에서 나온 음료를 뺨에다 대고, 열이 올린 얼굴을 식혔다. 사와무라가 쿠라모치가 방에서 나올 때까지 계속 만화책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눈이 마주쳤다면 들켰을지도 모른다. 음료수 캔을 손바닥으로 굴리면서 쿠라모치는 고개를 들어서 바로 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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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전이었다. 그리고 쿠라모치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제까지보다 가까운 거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대로라면 그것보다 멀어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쿠라모치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만화책은 그대로 침대 옆 바닥에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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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모치의 예상대로라면 그대로 아무 일 없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것이었고, 사와무라는 야구부 후배로 남을 것이었다. 예상대로라면 그랬다. 그의 소매를 잡아 끈 사와무라가 아니었다면. “선배를 좋아해요.” 그리고 쿠라모치가 입을 열기 전에 사와무라는 덧붙였다. “좋아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좋아해……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사와무라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일지 상상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만약에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는다면, 쿠라모치는 분명 그 때는 대답하려고 몇 번을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뒷머리를 꾸욱 누르며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