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au

여기서 이어짐.

 

서킷에서 호텔로 돌아온 것은 이미 해가 떨어진 이후였다. 호텔은 확실히 시원했다. 하루 종일 찜통더위를 견딘 쿠라모치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서 한숨을 쉬자 사와무라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다른 때였다면 인상을 쓰며 헤드락이라도 걸어주었을 테지만 엘리베이터에는 사와무라의 아군이 가득이었기에 옆에 서있는 사와무라를 노려보는 것으로 그만두었다. 사와무라도 그들의 눈을 피해서 쿠라모치에게 혀를 내밀었다.

쿠라모치는 먼저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에어컨을 켜두었기에 창은 닫아뒀지만 밖에서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에 섞인 동네 주민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까지 들려왔다. 뭔가 재미있는 거라도 하나 싶어서 쿠라모치도 텔레비전을 틀어보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채널에서는 축구, 축구, 알아들을 수 없는 뉴스, 외국 영화가 전부였다. 쿠라모치는 텔레비전을 껐다. 시트가 그새 조금 미지근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방안은 역시 쾌적했다. 조금 피로가 풀린 쿠라모치는 여기가 쿠알라룸푸르 시내가 아니라는 점을 아쉽다면 아쉽게 생각했지만, 역시 손님으로 와서 방까지 나누어 쓰는 입장에 그런 것을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첫 해외여행이 공항-숙소-서킷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관광이 목적인 것도 아니었다. 쿠라모치는 아주 잠깐 훑어보고 덮었던 말레이시아 가이드북을 떠올렸다.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쿠알라룸푸르 시내에는 트윈타워가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가이드북에서 말하는 더위가 이런 것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밖에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으아, 시원하다. 선배 우리 이따가 앞에 슈퍼 갈래요? 음료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욕실에서 나온 사와무라의 말에 쿠라모치는 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차피 저녁 먹으러 가자고 나가자고 올 거 같으니까 들어오는 길에 들리지요!”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 한두 시간쯤 전. 어제와 같은 식당을 나오며 쿠라모치는 아무래도 이번 일정은 정말 내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제보다는 조금 친해진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최대한, 알아들을 수 없는 팀 크루들의 영어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노력은 노력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몇 번 정도는 사와무라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사와무라조차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기에 쿠라모치는 다 포기하고 바디랭귀지로 승부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그것에도 익숙해졌지만, 사와무라는 술을 마시는 데에서는 빠지겠다며, 그럼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쿠라모치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퍼 주인의 말을 듣고도 가격이 찍힌 화면을 확인한 후에야 지갑을 연 쿠라모치는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은 후, 한발 먼저 슈퍼를 나간 사와무라의 뒤를 따랐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에게 콜라캔을 건네며 말했다.

“쿠라모치 선배 그렇게 영어 못해서 다음 시즌 어떡하려고 그래요.”

나도 못하긴 하지만. 먼저 딴 캔을 꿀꺽꿀꺽 들이키는 사와무라의 말에 쿠라모치는 잠시 다음 시즌과 영어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생각해야 했다—아니 그것을 어째서 사와무라가 알고 있는 것인지.

“다음 시즌?”
“선배 다음 시즌에 영국으로 간다면서요.”
“알고 있었어?”

끄덕이고는 사와무라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으음—메카닉 중에 친구가 그쪽 팀에 있다는 사람이 있어서, 들었대요, 계약 거의 다 된 거라고. 혹시 같은 사람인지 지난번에 선배 왔을 때 나한테 물어봐서 알게 됐는데요?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 클래스에 똑같은 이름인 사람은 또 없으니까.”

슈퍼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기에 호텔까지는 금방이었다. 호텔 로비를 가득 채운 불빛에 사와무라의 얼굴이 잘 보였다. 식당에서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조금 딱딱한, 사와무라답지 않은 얼굴—아니, 그저 조금 삐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사와무라가 일본 시리즈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의 쿠라모치도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제대로 계약 하면 얘기하려고 했어. 아직은 모르니까.”
“흐응…….”

사람들이 있는 로비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사와무라는 뚱한 표정을 풀지 않았기에 목소리를 조금 낮춘 채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이 내린 후에, 이번에는 상자 속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쿠라모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너도 정해졌을 때까지 말 안 했잖아.”
“에이, 그래도 나한테는 먼저 얘기해줄 줄 알았는데. 이쪽에서는 선배잖아요.”

그리고 사와무라는 금새 기분이 풀어진 것인지, 으스대면서 선배 운운 하기 시작했다. 재수 없게. 쿠라모치는 거리낌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지갑으로 사와무라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자식이 또.”

 

알람 소리에 먼저 깬 것은 쿠라모치였다.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더 꾸물거려도 괜찮지 않을까. 10시. 주말 이틀 동안 네 클래스—사륜 경기가 같이 진행될 때는 그 이상—의 세션을 진행해야 하는 일본시리즈의 제일 이른 세션이 아침 9시가 되기 전에 시작하기도 하는 것과 비하면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서킷까지 이동해야 하는데다가 세션이 시작하기 전까지 바이크의 셋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자연히 선수들의 아침은 그것보다 빨리 시작하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기상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금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쿠라모치가 건너편 침대에 있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자 그쪽도 이불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알람을 멈추었다.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쿠라모치를 향했다.

“……깨 있네요.”
“응.”
“졸리다.”
“나도.”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쿠라모치는 몸을 일으키고는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아침은 1층의 식당일 것이다. 약간의 향토색이 가미된 뷔페식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오후가 되면 더워질 것이고, 오후가 되면 예선이 있다. 오늘도 박스에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가 가죽 수트를 입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로는 슬라이더를 붙이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이어플러그를 건네주고, 손에는 글러브를 끼워줄 것이다. 그리고 낯익은 무늬의 헬멧을 쓴 사와무라가 개라지를 나가는 것을 본 후에는 랩타임을 보여주는 스크린에서 이름을 찾을 것이다. 예선 성적이 좋다면, 오늘 오후에는 개라지 안이 아니라 파크퍼메까지 마중을 나가도 좋을 것이다. 이빨을 닦으면서 쿠라모치는 혹여나 카메라에 비칠 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헤어스타일에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