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입스 때의 쿠라사와를 생각하면 love can save the world; mine, not even you 같은 말이 떠오른다.

 

입스. 쿠라모치의 귀에 익은 단어였지만 여전히 낯선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겪어본 적은 없었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반년을 되돌아보았다—부활동 첫날 제시간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큰소리만 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엊그제 같았건만. 그리고 고시엔행 티켓을 둔 결승전도 떠올려보았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퇴색되지는 않고 생생하고 긴 기억이었다. 그 시합의 터닝포인트를 떠올릴 때마다—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는 오히려 공감할 수 있었다. 사와무라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쿠라모치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엊그제 식당에서, 미유키는 야쿠시와의 연습경기 후 남으라는 말을 들은 사와무라에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말해주었다.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카와카미와 사와무라를 남으라고 말했다. 그 경기에서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했던 사와무라였다. 쿠라모치는 크리스가 있을 때 진행되던 반성회의 심화판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동안 2군에 내려가 있으라는 처방이 내려올지도 모른다고. 충격요법 같은 것으로, 한 번쯤은 겪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2군에서도 요란하게 지나다가 복귀할 것이 그려졌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벤치 멤버에는 남아있지만 당분간 “특별” 메뉴를 따르게 되었고, 다른 말로 하자면 열외가 되어서, 공은 만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나시로와의 경기가 끝난 후 느꼈던 불안한 고요함이, 이제 와서 다시 찾아왔다.

 

몇 시간째인지 알 수 없지만 사와무라는 비디오를 틀어둔 텔레비전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을 만질 수 없게 된 사와무라가 기숙사 방에 들어오는 시간은 전보다 빨라졌다. 부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 조금 바빠지며 쿠라모치의 귀가시간이 조금 바빠졌다. 하지지만 전체적으로 쿠라모치가 사와무라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마주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쿠라모치에게는 이 시간이 더욱 불편했다. 사와무라를 보고만 있어도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 사와무라의 우울함은 마스코 선배가 방을 나가던 날보다도 깊었고, 크리스 선배가 1군에 승격하지 못하던 날보다도 어두웠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훌쩍이는 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쿠라모치는 이런 우울함이 싫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아니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방법에 의문만이 가득해서, 그가 약한 부분이었다. 이런 때에는 억지로 기술을 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신체의 유연성과는 상관없이 정말로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러진 것은 붙지 않는다.

얼굴을 보기도 싫어서 침대 위에 올라와서 잡지를 읽던 쿠라모치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형광등 아래 사와무라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텔레비전 앞에 웅크려 앉아있는 모습에 쿠라모치는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렸다. 옆으로 누운 채로 잡지를 잡았으나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줄을 읽던 그는 끝내 잡지를 덮었다.

인상을 쓰고 쿠라모치는 베개를 아래로 내던졌다.

“아!”

뭐가 아프다는 건지 사와무라는 베개로 맞은 부분을 손으로 문대고 있었다. 어쨌든 입이 열렸기에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들어가.”
“네?”
“침대. 언제까지 깨있을 거야.”
“이것만 보고요.”
“벌써 몇 시간째잖아. 그만 자자?”
“……알았어요.”

아직은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계를 바라본 사와무라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이상 쿠라모치와 투닥거리지도 않고 리모컨을 집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에게 먼저 베개를 돌려주고 전등 스위치를 끄러 문간으로 향했다. 사와무라가 침대로 돌아왔을 때 쿠라모치는 침대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어디 가게요?”
“너 딴짓 하면서 깨어있는 건 아닌가 확인하게.”

베개부터 침대 위로 던진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고등학생 두 사람이 같이 눕기에는 좁은 침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와무라는 투덜거리면서 벽으로 몸을 붙이고 누웠다.

“안으로 들어가. 좁아.”
“……더 들어갈 데 없어요.”
“그럼 할 수 없네.”

더 들어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은 어깨 위를 떠나지 않고 토닥토닥 도닥이다가, 또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읽어내듯이 느릿느릿 등을 쓰다듬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가을. 이불과 옷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체온은 빠져나갈 곳 없이 머물렀다.

“쿠라모치 선배.”
“응.”
“더워요.”
“별로.”

쿠라모치는 눈을 감은 채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2층으로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 확실했기에 사와무라도 눈을 감고 그대로 자기로 했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열대야가 와서 그렇다거나, 아직 덜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와무라는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선배.”
“응?”
“좀 있으면 개학이네요.”
“그러네.”

개학은 바로 이틀 뒤. 그다음에는 또 가을 대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되어야 했다.

 

공을 잡지 못하는 동안 조용해진 사와무라는 그 공허를 소리 없는 글자로 채우는 모양이었다. 학기 중에 그렇듯 만화책을 빌려오지는 못하기에 그림은 없는 책이었다. 활자는 조용하지만, 종이 위를 가득 채우는 글자의 검은색은 때때로 압도적이다. 그런 것에서 에너지를 얻기라도 하는 것일까, 사와무라의 머릿속도 평소에는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로 그렇게 가득 차 있을까—쿠라모치로서는 알 수 없이었지만 차라리 그러기라도 했으면 다행이었다. 이런 것은 사와무라와 어울리지 않았다. 독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용한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열어둘 수 없는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은……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가, 학교에 가져갈 책을 정리하던 쿠라모치는 이전에 샀던 다른 책을 찾아보았다.

판형이 큰 잡지 옆에 꽂혀있던 하드커버 책을 꺼낸 쿠라모치는 책을 한 번 스르륵 훑어보았다. 이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자주 읽은 것은 아니라서 겉표지도 깨끗한 책이었다. 쿠라모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깨끗한 뒷면을 보며 갑자기 이대로 책을 빌려줬다가는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서 쿠라모치는 이름을 써놓기로 했다. 책상 서랍에 둔 굵은 유성펜을 찾아서 회색 뒤표지의 아래쪽에 쿠라모치라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고 동그라미까지 쳐두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쿠라모치는 책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무패의 법칙, 힉슨 그레이시. 어차피 사와무라는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이라는 것을 쿠라모치는 알고 있었다. 다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야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상한 점이나 읊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유격수라는 단어의 유래나, 갑자원의 이름의 뜻 같은 것을 찾아보았듯이, 분명 표지에 나온 사람은 누구냐는 것부터 물어볼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자잘한 것을 기억할 것이라면 좋은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 나을 것이다. 쿠라모치는 직접 해 줄 수 없는 긍정적인 말. 쿠라모치의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어떤 것인지 알 리가 없겠지만, 사와무라도 읽을 것이다.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못하겠지만.

쿠라모치의 예상과 같았던 것은 이것도 읽으라는 말에 책을 받아든 사와무라가 처음 내뱉은 질문이었다. ‘이 사람은 누군데요? 유명합니까?’

예상과 달랐던 점은 사와무라가 그 주가 끝나기 전에 책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이었다.

“다 읽기는 한 거야?”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사와무라는 발끈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를 뭐로 보고!”

쉬는 시간에 틈틈이 읽었다고 사와무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랜만에 되돌아온 것 같은 이 익숙한 흐름에 쿠라모치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면서 책을 받아들었다. 감상은 묻지 말자고 생각하던 차였건만, 간만에 대화를 할 마음이 든 것인지 사와무라가 한마디 덧붙였다.

“선배가 이런 책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특이한 취향이네요. 선배 책 별로 안 읽지요?”
“웃기시네. 너보다는 많이 읽을 거다.”

자연스러운 디스에 질 수 없다는 기분이 든 쿠라모치도 금방 답했다. 오늘의 사와무라는 정말로, 이야기를 할 기분이었는지 모처럼 말이 많았기에 쿠라모치도 자연스레 반박에 반박을 이어갔다. 만화책은 빼야 한다고 못을 박자 사와무라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신음을 냈다.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자 쿠라모치는 승리를 확신했다.

“쿠라모치 선배, 좋아하는 책 있으면 나중에 또 빌려줘요.”

책을 꽂는 쿠라모치의 등 뒤에서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책이 얼마 꽂혀있지 않은 책장을 바라보며 쿠라모치도 중얼거렸다.

“글쎄—너한테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다른 방들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쿠라모치는 5호실은 꽤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말이 많았다. 쿠라모치가 흥미를 보이든 보이지 않든 기회가 될 때마다 그날 있던 일을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쿠라모치가 모르는 곳에서도 사와무라가 바쁘게 지낸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쿠라모치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때에, 사와무라는 성장해왔다. 이번에도 쿠라모치가 보는 것은 변화 후의 모습이었다.

“늦게 들어왔네.”

오랜 특별메뉴 후, 감독이 사와무라를 불펜으로 불렀다. 공에 손을 대는 것은 금지, 다음은 외야 연습 참가, 그리고 불펜. 여전히 인코스는 던질 수 없었지만, 적어도 사와무라의 자율연습 메뉴가 이전과 같아졌다. 사와무라가 실내연습장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방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그만큼 늦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욱 늦은 것 같았다.

“쿠라모치 선배, 오늘 위에서 자도 돼요?”

기분이 좋은지 사와무라가 먼저 그렇게 물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웃는 모습에, 쿠라모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쌰, 요란하게 자리에 누운 사와무라는 쿠라모치가 묻지 않았는데도 실내연습장에서의 일을 조잘거렸다.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사와무라가 말한 이름에는 쿠라모치도 조금 놀랐다. 크리스 선배는 정말 사와무라의 스승이 분명했다. 잘됐네, 끄덕거리며 사와무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쿠라모치는 며칠 전의 미유키의 말을 떠올렸다—입스 같은 거로 무너지면 곤란하다고 했었지.

“선배.”
“응.”
“빨리 시합에 다시 나가고 싶어요.”
“그래.”
“빨리 던지고 싶다.”
“응—너 외야는 아무래도 영 아니니까.”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만이 방안에 울렸다. 이렇게 쿠라모치가 말하는 말에, 이렇게 사와무라가 웃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입스 같은 것, 어째서 아직도 벤치멤버에 있느냐는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지나온 몇 주.

앞으로 얼마간도 그런 목소리에 반박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날은 찾아올 것이다.

 

사와무라는 금방 잠에 떨어진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자는 얼굴이 익숙했다. 적어도 자는 동안의 사와무라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기숙사에 들어온 첫날 옆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방을 나갈 준비를 하며 움직이던 쿠라모치와 마스코도 모른 채 잠에 바닥에서 잠에 빠져있던 얼굴. 요즘에 쿠라모치는 그것이 사와무라가 깨어있을 때의 얼굴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를 옆에 두고 쿠라모치는 자주 생각한다. 누가 선발로 마운드에 서는지, 에이스 번호가 누구에게 가는지는 결과가 좋기만 하다면 쿠라모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방에 들어온 후배는 에이스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지금은 사와무라가 투수로서 행복하다면 그것을 바랄 뿐이었다.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고 한다. 그 문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것이었고, 그래야 할 것이라고 그도 생각한다. 이해타산 없는 진정한 감정은 그럴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그저 그의 가슴을 조금 더 아리게 하고, 무력감을 일으키며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 뿐이다. 사랑을 해도 그는 그가 아끼는 사람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사랑으로는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쿠라모치 요이치의 세상에 사랑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하나 늘어났다.

 

But mine, not even you

 

그럼에도. 분명 앞으로도 그는 투수 사와무라 에이준의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없음에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미트에 부딪히는 소리. 바로 얼굴 옆으로 다가온 공에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리치던 사와무라가 인코스를 던졌다는 말에 얼빠진 표정으로 바뀐 것이 잠시 후.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들린 마운드로부터의 외침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