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사와, senses

 

손에 닿는 거리. 그것이 쿠라모치와 사와무라 사이의 거리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랬다. 관절기를 걸면 그것보다 가까워지고, 팔이 풀리면 그것보다 조금 멀어진다. 쿠라모치의 고민은 그가 그 안정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가 내미는 손이 상냥해진다면, 그럴 수 있을지 쿠라모치도 자신이 없었지만, 사와무라가 어떻게 나올까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또다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움직이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었다. 도망가지 않을 것인지. 신기하게도, 사와무라는 여태까지 도망간 적은 없었지만. 쿠라모치가 사와무라를 마음에 들어 해도, 사와무라가 그를 피하지 않아도, 그가 사와무라를 자신의 세상에 들여놓을 수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 쿠라모치는 이전처럼 남의 일에는 손을 대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것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러기 전에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마스코 선배의 푸딩에 손을 대지 않는 것처럼, 상식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쿠라모치가 가지고 있는 그런 구분이 흐려지는 곳도 있었다. 야구부가 그중 하나. 그리고 그것보다 작고 혼란스러운 것이 5호실. 룸메이트는 가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인이지만, 이름이나 얼굴만을 아는 타인과는 달랐다—마스코 선배의 무언을 통역하는 것도, 사와무라에게 관절기를 거는 것도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쿠라모치는 가끔 그곳에 당연하게 있는 모든 것이 자기 것 같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날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지만 그런 날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5호실은 아직까지 그에게 집을 떠난 집이었고, 그 방의 거주자들은 가족은 아닌 가족. 그렇지만 분명 내편인 사람.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어디까지 ‘내’ 것이라고 부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의 무엇인지는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후배, 팀메이트, 룸메이트. 그 이상은? 그 이상을 원하는 마음은 있었다.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마음에 드는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입학 당초의 큰소리치던 모습과는 다르게, 겸손하지는 않더라도 허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바보 같은 모습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단순하고, 읽기 쉽고, 누구를 속일만한 재주는 갖고 있지 못했다. 그 한결같은 성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쿠라모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달달한 냄새의 정체에 대해서도.

쿠라모치가 자기 눈에 무엇이 씌었나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먼저였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냄새가 스멀스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티가 날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치 챈 순간부터 신경이 쓰였다. 그 단 냄새가 무엇과 닮아있었는지 알게 된 것은 사와무라가 마스코 선배와 맞붙게 된, 1학년들과 2·3학년간의 경기를 마친 저녁이었다. 마스코 선배와 함께 방으로 돌아온 쿠라모치는 사와무라가 홈런을 얻어맞은 것에 침울해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 반대였다. 사와무라는 태연하게 마스코 선배의 푸딩을 먹고, 아니 동을 내고 있었다. 빈 푸딩 컵을 들고 슬퍼하는 마스코 선배의 옆에서 지나갔다. 쿠라모치가 열어볼 일이 없는 비닐껍질의 아래에 숨겨 있는 연노란색의 달콤한 향.

마스코 선배가 없는 지금은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있었다. 다른 때는 모르지만 5호실에 둘만이 남아있을 때면. 쿠라모치는 제 일을 하지 못하고 손 안에 쥐여 있는 샤프를 공책 위에 탁 내려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와무라!”

쿠라모치는 용의자의 이름을 불렀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서 만화책 삼매경이었던 사와무라는 깜작 놀라서 어물어물 책상에 앉아있던 쿠라모치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아니었다. 쿠라모치와 한창 이러니 저러니 선배에게 대든다니 멀쩡한 사람을 잡느니 하는 말다툼을 끝낸 끝에 다시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편 사와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이 달콤하다는 말은 거짓말 같다고 사와무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 또한 순정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전개이기는 했다. 가슴이 저릿한 쌉싸름함마저 포함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다만 대부분의 만화처럼 사와무라에게도 끝에 그것을 덮을 달달함이 기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독자인 사와무라는 그런 묘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니 이제까지는 여타의 짝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짝사랑이라는 것은 큰 문제가 분명했다. 짝사랑이라는 말을 가져왔지만 사와무라는 그 세 글자는 물론이며 제일 첫 글자를 떼어놓은 그 다음의 두 글자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화적인 과장을 덜어내더라도 자신과 들어맞는 것이 많아 보이기는 했다—누가 확인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와무라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이 어딘지도 분명하지 않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갈 방법도 알 수 없다는 점이 그 다음, 그렇다고 나아가야 할지도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난문이었다. 사와무라는 자신의 사랑이 연애로 이어질 기미를 보이지도 않을 때마다—딱히 쿠라모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내심 실망하면서 순정만화를 펼쳐 보곤 했다. 여주인공들처럼 깊게 고민하기에 사와무라의 시간은 부족했고, 행동하기에는 그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연애를 대신 바라보았다. 종이를 넘기는 것으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세상이었다. 대리만족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정만화 다음으로 사와무라가 찾는 것이 냉장고에 남아있는 간식거리. 마스코 선배가 나간 5호실이었지만, 이전처럼 사와무라가 빼앗아먹을 푸딩은 있었다. 가끔 쿠라모치가 냉장고에 푸딩을 하나 둘 쌓아둘 때가 있기 때문이다.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잊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쿠라모치가 그것을 먹는 일은 그다지 없었고, 그렇게 방치된 푸딩을 냉장고를 열 때마다 바라만 보던 사와무라가 상미기한이 걱정된다는 듯이 먹을 때면 쿠라모치에게 들켜서—때마침 방에 들어오거나, 냉장고를 열어보고 사와무라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하는 등 들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들키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다—심부름을 하러 나가게 된다거나 관절기에 걸린다거나 하는 보복을 당하게 되곤 했다. 아직 날이 덥던 동안에 사와무라는 그것이 쿠라모치 나름의 위로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에도 냉장고에 놓이는 푸딩을 볼 때마다 쿠라모치가 세 사람이 있던 5호실을 그리워하는 방식일까 하는 추측도 했다.

마스코 선배가 방을 떠나고 두 사람만이 남게 된 이후로 무언가가 이상해졌다고 사와무라는 느꼈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았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와무라는 관찰했다. 대상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의 눈을 피해서 사와무라는 관찰했다. 관찰이라고 해도 시간 단위로 그러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멍하니 몇 초, 몇 십 초 동안 바라볼 때도 있었다. 주로 뒷모습을. 등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기에 쳐다보더라도 들키지 않았지만, 등에는 표정이 없었다. 게임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곧은 등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 등을 바라볼 일이 없기에 사와무라는 그것이라도 보았다. 쿠라모치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사와무라는 고개를 숙인다.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시선을 느낀 것이 분명함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하는 사와무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은 갑자기 찾아왔다. 사와무라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 새에 침대 옆에 서있는 쿠라모치가 사와무라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침대 옆에서 사와무라를 내려다보는 쿠라모치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너 맞았구나.”
“뭐가요?”
“혼자 하는 말이야. 그것보다, 너는 뭐가 불만라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그걸 어떻ㄱ—아니 무슨 소립니까, 누가 쳐다본다고요!”
“시치미 떼지 말고. 벌써 몇 달째 그러고 있는 거 다 알아, 모르는 게 바보겠다.”

사실을 지적당한 탓인지 사와무라는 입을 껌뻑껌뻑 거리는 채로 얼굴을 붉혔다.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것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 쿠라모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요.”
“그럼 뭔데? 너 나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휙휙 좌우로 움직이던 고개가 갑자기 멈추었다. 앞머리 아래로 진 그림자마저 붉은 색을 띠는 것 같았지만, 쿠라모치의 눈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다. 어디로 피하고 싶은 티가 가득한 눈동자가 가까스로 마주치고 있는 것만이 보였다. 그러니까 사와무라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기다리던 종류의 말이었지만, 사와무라는 그것이 전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직설적이고, 부정하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에 순간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도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푹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잘 됐네. 나도 그래.”

달콤하지 않았다는 말은 취소. 쿠라모치의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돌린 얼굴을 올려다본 사와무라가 곧바로 한 생각이었다. 그냥 세련되지 못할 뿐이었다. 좋다는 말이 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 어, 그러면 이거는…… 양방향이라는 거네요? 그렇지요?”

무엇이 좋은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 얼굴로 쿠라모치를 붙잡은 사와무라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쿠라모치는 언제나 누구 것인지, 자기 것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던 그것을 입에 물었다. 은박 껍질을 뜯으면 드러나는 촉촉하고 말랑말랑, 쉽게 뭉그러지던 단 것의 맛은 나지 않았다. 플라스틱 컵 바닥에 가라앉은 캐러멜소스 같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런 때 해야 할 말은, 쿠라모치의 입에서 나온 말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가끔,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아무런 맛은 없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사와무라는 쿠라모치의 팔을 때리면서 불만을 표했지만, 지금의 쿠라모치는 그런 것에 화를 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사와무라만, 쿠라모치도 순정만화를 보면서 조금은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